출세욕, 식탐, 건강염려증 … 아를 시절의 고흐를 지배한 3가지 감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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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아를에서의 건강염려증
아를에서의 건강염려증
고흐는 1888년 2월 남프랑스로 갔다. 겨울의 파리에서는 몸에 기력도 없고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으쓱으쓱 춥더니 온몸에 열이 났다. 이러다 죽으면 어쩌나 싶어 와락 겁이 났다. 병약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따뜻한 햇볕이 절박했다. 그래서 무작정 남쪽으로 갔다. 아름다운 경치와 따뜻한 기후로 유명한 아를(Arles)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큰 기대를 걸고 하루 밤낮을 들여 도착했더니 그곳은 하얀 눈으로 쌓여 있었다. 하필 그날은 25년 만의 강추위가 찾아온 날이었다. 고흐는 식당이 딸린 카렐 호텔에 작은 방을 얻었다. 담배와 술도 줄이고 포근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봄이 되자 지중해로부터 보드라운 바람이 불어와 아를은 꽃나무들로 눈부셨다. 고운 색상들이 고흐의 눈을 자극했다. 미세한 색채의 차이를 화폭에 담고자 고흐는 여러 종류의 꽃나무를 그렸다. 유명 화가들과 르누아르와 같은 인상파 거장들의 과수원 그림들을 파헤쳤다. 실력파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때 그린 작품들 중 하나가 '꽃핀 복숭아나무(Pink Peach Tree in Bloom)'(1888년 3월 30일)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마우버를 기리며(Souvenir de Mauve)”라는 부제와 ‘빈센트’라는 서명이 있다. 고흐는 이 그림을 스승인 안톤 마우버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사촌인 예트 마우버에게 보냈다. 그녀는 2월 초에 남편을 잃고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부제에 명시된 마우버는 네덜란드 미술협회인 헤이그화파의 한 사람으로 명망 높은 화가였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당대 화상들에게 1순위 수집품이었다. 6년여 전에 이 대단한 인물이 고흐에게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고, 목탄화, 수채화, 유화 등을 지도해 주었다. 손수 팔레트를 드는 법까지도 알려 주었다. 그 시절 고흐는 “그림과 함께, 이제부터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된다”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성장이냐 성공이냐
고흐는 원래 이 작품에 ‘빈센트와 테오’라는 서명을 넣으려고 했다. 그런 형에게 테오는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 화가 대 화가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고흐만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등 좀 엉뚱한 주장을 했다. 고흐는 테오의 이름을 뺀 채 미망인에게 그림을 보냈다. 연구가들은 테오의 이런 태도에 많은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동생은 무엇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학자들은 마우버의 결별 사건에 주목했다. 1882년 5월 고흐는 마우버의 조언을 무시한 채 여자 모델들을 작업실로 불렀다. 스승은 석고상으로 인물 소묘를 꾸준히 할 것을 당부했건만 제자는 그것을 묵살하고는 여자들에게 돈을 주었다. 이후 궁핍한 상황에서도 고흐는 줄곧 모델들을 불러 대화하며 작업했다. 결국 마우버는 고흐를 가르친 지 6개월 만에 절교를 선언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고 스승은 별세했고 고흐는 그 사실을 두 달 전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유족인 자신의 사촌을 위로하려고 했다면 파리에서 당장에 조문했을 것이다.
도대체 고흐는 어떤 의도로 사촌에게 '꽃핀 복숭아나무'를 보낸 것일까? 고흐는 테오와 공동 사업을 구상하면서 이 그림을 불현듯 사촌이 사는 네덜란드로 보냈다. 그곳에는 당시 전시 기획자로 이름 높은 테르스테이흐가 있었고, 고흐의 편지에 그가 여러 번 거론되곤 했다. 연구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들어 고흐가 이 작품으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고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테오도 이런 형의 태도를 싫어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설명이 맞다면 '꽃핀 복숭아나무'는 출세를 향한 고흐의 비정함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고흐는 성공에 집착한 결과,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일에는 소홀히 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작품을 더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고, 그러면 그럴수록 네덜란드와 프랑스에 있는 인맥에 더 매달렸던 것이다.
세 가지 욕구와 건강염려증
그해 여름까지 고흐는 자신의 어떤 작품으로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괜찮은 인간관계도 맺지 못했다.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너무 기진맥진하고 아파서 혼자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저녁 식사나 커피를 주문할 때 이외에는 하루 종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있어. 다시 또 예전처럼 말이야.”
이제 그에게 찾아온 것은 외로움뿐이었다. 한동안 고흐는 우두커니 카렐 식당 위층 방에 박혀 지냈다. 신경질적으로 식당에 더 나은 음식과 포도주를 요구했다. 음식에 대한 날카로운 요구는 생존에 대한 위협에서 나온다. 생존 욕구는 무의식적으로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음식물에 예민하다. 성장을 배제한 조급한 성공 욕구가 인간관계에 집착한 결과였다.
고흐는 아를에서 스승의 죽음까지 출세의 수단과 ‘지인 찬스’의 기회로 여겼다. 자기 성장보다는 성공을 목표로한 관계 욕구에 빠져 있었다. 물론 꽃나무를 그리기 시작할 때는 거장들의 꽃그림을 탐구하여 자신의 실력을 갖추려 했었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 그 성장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관계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마저 충족되지 않자 탐식에 빠졌다. 청년 못지않은 고흐의 식탐은 생존 본능이었다. 성장과 관계에 대한 욕구불만은 식탐으로 자신을 보상하는 법이다. 심리학자 클레이턴 앨더퍼(Clayton Alderfer)는 이 현상을 욕구들의 ‘좌절-퇴행 원칙’이라 했다. 그에 따르면 생존(existence), 관계(relationness), 성장(growth) 욕구에서 인간은 앞의 욕구를 충족하면 더 뒤에 있는 욕구를 추구하게 되는 반면, 뒤에 있는 욕구가 좌절되면 바로 앞에 있는 욕구로 퇴행될 수 있다고 했다.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았던 고흐는 남부의 따뜻한 기후에도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심각한 병에 걸릴까 봐 온종일 불안했다. 깜박깜박 정신적으로 몽롱했다. 그의 편지들 사이로 불안을 투덜대는 문장들이 자주 나타났다. “다시 멍하니 생각에 골몰해졌어. 맙소사, 기운이 다 빠지고 나는 너무 우울해.” 실제로는 몸에 이상이 없거나 가벼운 증상임에도 불구하고 생존에 예민하다면 이것이 바로 건강염려증이다. 한마디로 성장과 관계에 대한 욕구불만에서 퇴행을 거듭해 생존 욕구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력
고흐가 건강염려증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2년 전 거의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 온몸에 퍼진 나선상균을 제거하려고 독한 수은제 치료를 받았고 파리에서는 바쁜 일과 속에서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않았다. 늘 심한 복통과 소화불량을 안고 살았다. 그런 고흐에게 희소식이 들렸다. 유명한 화가 몽티셀리가 자신과 비슷한 세균에 전염된 병력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냈단다. 더군다나 그의 그림은 역설적이게도 참으로 따뜻하지 않은가. 고흐는 테오에게 감격하며 말했다.
“몽티셀리는 열정적이고 영원한 것,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부의 풍요로운 색채와 풍부한 태양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어.” 고흐는 이런 포근한 색채는 평안한 마음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 색채와 마음을 얻고자 고흐는 파리의 끔찍한 겨울을 피해 몽티셀리가 살았던 마르세유로 길을 나섰던 것이다. 우선 아름다운 경치와 따뜻한 기후로 유명한 아를을 잠깐 들를 계획이었지만 거기에 정착하고 말았다.
고흐는 몸이 회복되고 건강에 자신감이 생기자 그곳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남프랑스 사람들의 기질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이곳 사람들도 그에게 마음을 내놓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고흐는 전시 기획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던 테오와 화해하려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자 테오는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고흐의 몇 작품을 전위 미술을 위한 최고의 장소인 앵데팡당전의 4주년 전시회에 제출하자고 제안했다. 테오와의 사이가 이렇게 빨리 개선되자 고흐는 형제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그림 판매와 전시 사업에 전력하자고 말했다. 아마도 이 짧은 순간에 고흐는 자신의 성장 욕구를 성공 욕구로 바꾼 것 같다. 그 뒤로 자신을 다그쳐서 15개월 만에 200개 이상의 작품을 완성했으니 말이다. 어림잡아 일주일에 세 편 이상의 작품을 완성했다. 아마도 이때 고흐가 좀 더 천천히 자신의 실력을 쌓았다면 아마 그렇게 빨리 시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생존과 관계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되면 누구라도 성장에 정성을 쏟는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세포분열을 통해 계속 성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생명력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생명력을 성공이란 이유로 가둬 버리고 나면 결국 몸살을 앓다가 생명력을 잃고 서서히 꺼져갈 뿐이다. 건강염려증을 달고 살았던 고흐는 그림을 통해 출세하려는 현실적인 나약함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서는 말라빠진 나무라 해도 반드시 꽃을 피우는 그 생명력을 소망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꽃나무들’이다. 만일 현실에서 생존 욕구, 관계 욕구, 성장 욕구가 적절하게 채워졌다면 고흐는 분명 그 생명력을 더 강렬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복숭아나무'의 분홍 꽃들이 어떻게 보일까? 생명력일까? 아니면 매혹적인 성공일까? 만난 적도 없는 친구들의 명수로 우리의 웹페이지를 자랑하거나 호화로운 음식들로만 장식한다면 우리도 곧 몸살을 앓을 것이다. 자, 더 늦기 전에 겨울 찬바람에도 얼어 죽지 않는 저 강한 생명의 불꽃에 우리의 정성을 모으자.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
봄이 되자 지중해로부터 보드라운 바람이 불어와 아를은 꽃나무들로 눈부셨다. 고운 색상들이 고흐의 눈을 자극했다. 미세한 색채의 차이를 화폭에 담고자 고흐는 여러 종류의 꽃나무를 그렸다. 유명 화가들과 르누아르와 같은 인상파 거장들의 과수원 그림들을 파헤쳤다. 실력파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때 그린 작품들 중 하나가 '꽃핀 복숭아나무(Pink Peach Tree in Bloom)'(1888년 3월 30일)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마우버를 기리며(Souvenir de Mauve)”라는 부제와 ‘빈센트’라는 서명이 있다. 고흐는 이 그림을 스승인 안톤 마우버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사촌인 예트 마우버에게 보냈다. 그녀는 2월 초에 남편을 잃고 큰 슬픔에 빠져 있었다. 부제에 명시된 마우버는 네덜란드 미술협회인 헤이그화파의 한 사람으로 명망 높은 화가였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당대 화상들에게 1순위 수집품이었다. 6년여 전에 이 대단한 인물이 고흐에게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고, 목탄화, 수채화, 유화 등을 지도해 주었다. 손수 팔레트를 드는 법까지도 알려 주었다. 그 시절 고흐는 “그림과 함께, 이제부터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된다”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성장이냐 성공이냐
고흐는 원래 이 작품에 ‘빈센트와 테오’라는 서명을 넣으려고 했다. 그런 형에게 테오는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 화가 대 화가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고흐만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등 좀 엉뚱한 주장을 했다. 고흐는 테오의 이름을 뺀 채 미망인에게 그림을 보냈다. 연구가들은 테오의 이런 태도에 많은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동생은 무엇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학자들은 마우버의 결별 사건에 주목했다. 1882년 5월 고흐는 마우버의 조언을 무시한 채 여자 모델들을 작업실로 불렀다. 스승은 석고상으로 인물 소묘를 꾸준히 할 것을 당부했건만 제자는 그것을 묵살하고는 여자들에게 돈을 주었다. 이후 궁핍한 상황에서도 고흐는 줄곧 모델들을 불러 대화하며 작업했다. 결국 마우버는 고흐를 가르친 지 6개월 만에 절교를 선언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고 스승은 별세했고 고흐는 그 사실을 두 달 전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유족인 자신의 사촌을 위로하려고 했다면 파리에서 당장에 조문했을 것이다.
도대체 고흐는 어떤 의도로 사촌에게 '꽃핀 복숭아나무'를 보낸 것일까? 고흐는 테오와 공동 사업을 구상하면서 이 그림을 불현듯 사촌이 사는 네덜란드로 보냈다. 그곳에는 당시 전시 기획자로 이름 높은 테르스테이흐가 있었고, 고흐의 편지에 그가 여러 번 거론되곤 했다. 연구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들어 고흐가 이 작품으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고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테오도 이런 형의 태도를 싫어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설명이 맞다면 '꽃핀 복숭아나무'는 출세를 향한 고흐의 비정함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고흐는 성공에 집착한 결과,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일에는 소홀히 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작품을 더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고, 그러면 그럴수록 네덜란드와 프랑스에 있는 인맥에 더 매달렸던 것이다.
세 가지 욕구와 건강염려증
그해 여름까지 고흐는 자신의 어떤 작품으로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괜찮은 인간관계도 맺지 못했다.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너무 기진맥진하고 아파서 혼자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저녁 식사나 커피를 주문할 때 이외에는 하루 종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있어. 다시 또 예전처럼 말이야.”
이제 그에게 찾아온 것은 외로움뿐이었다. 한동안 고흐는 우두커니 카렐 식당 위층 방에 박혀 지냈다. 신경질적으로 식당에 더 나은 음식과 포도주를 요구했다. 음식에 대한 날카로운 요구는 생존에 대한 위협에서 나온다. 생존 욕구는 무의식적으로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음식물에 예민하다. 성장을 배제한 조급한 성공 욕구가 인간관계에 집착한 결과였다.
고흐는 아를에서 스승의 죽음까지 출세의 수단과 ‘지인 찬스’의 기회로 여겼다. 자기 성장보다는 성공을 목표로한 관계 욕구에 빠져 있었다. 물론 꽃나무를 그리기 시작할 때는 거장들의 꽃그림을 탐구하여 자신의 실력을 갖추려 했었다. 하지만 가난 속에서 그 성장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관계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마저 충족되지 않자 탐식에 빠졌다. 청년 못지않은 고흐의 식탐은 생존 본능이었다. 성장과 관계에 대한 욕구불만은 식탐으로 자신을 보상하는 법이다. 심리학자 클레이턴 앨더퍼(Clayton Alderfer)는 이 현상을 욕구들의 ‘좌절-퇴행 원칙’이라 했다. 그에 따르면 생존(existence), 관계(relationness), 성장(growth) 욕구에서 인간은 앞의 욕구를 충족하면 더 뒤에 있는 욕구를 추구하게 되는 반면, 뒤에 있는 욕구가 좌절되면 바로 앞에 있는 욕구로 퇴행될 수 있다고 했다.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았던 고흐는 남부의 따뜻한 기후에도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심각한 병에 걸릴까 봐 온종일 불안했다. 깜박깜박 정신적으로 몽롱했다. 그의 편지들 사이로 불안을 투덜대는 문장들이 자주 나타났다. “다시 멍하니 생각에 골몰해졌어. 맙소사, 기운이 다 빠지고 나는 너무 우울해.” 실제로는 몸에 이상이 없거나 가벼운 증상임에도 불구하고 생존에 예민하다면 이것이 바로 건강염려증이다. 한마디로 성장과 관계에 대한 욕구불만에서 퇴행을 거듭해 생존 욕구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력
고흐가 건강염려증을 가졌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2년 전 거의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 온몸에 퍼진 나선상균을 제거하려고 독한 수은제 치료를 받았고 파리에서는 바쁜 일과 속에서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않았다. 늘 심한 복통과 소화불량을 안고 살았다. 그런 고흐에게 희소식이 들렸다. 유명한 화가 몽티셀리가 자신과 비슷한 세균에 전염된 병력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냈단다. 더군다나 그의 그림은 역설적이게도 참으로 따뜻하지 않은가. 고흐는 테오에게 감격하며 말했다.
“몽티셀리는 열정적이고 영원한 것,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부의 풍요로운 색채와 풍부한 태양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어.” 고흐는 이런 포근한 색채는 평안한 마음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 색채와 마음을 얻고자 고흐는 파리의 끔찍한 겨울을 피해 몽티셀리가 살았던 마르세유로 길을 나섰던 것이다. 우선 아름다운 경치와 따뜻한 기후로 유명한 아를을 잠깐 들를 계획이었지만 거기에 정착하고 말았다.
고흐는 몸이 회복되고 건강에 자신감이 생기자 그곳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남프랑스 사람들의 기질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이곳 사람들도 그에게 마음을 내놓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고흐는 전시 기획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던 테오와 화해하려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자 테오는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고흐의 몇 작품을 전위 미술을 위한 최고의 장소인 앵데팡당전의 4주년 전시회에 제출하자고 제안했다. 테오와의 사이가 이렇게 빨리 개선되자 고흐는 형제의 미래에 희망을 걸고 그림 판매와 전시 사업에 전력하자고 말했다. 아마도 이 짧은 순간에 고흐는 자신의 성장 욕구를 성공 욕구로 바꾼 것 같다. 그 뒤로 자신을 다그쳐서 15개월 만에 200개 이상의 작품을 완성했으니 말이다. 어림잡아 일주일에 세 편 이상의 작품을 완성했다. 아마도 이때 고흐가 좀 더 천천히 자신의 실력을 쌓았다면 아마 그렇게 빨리 시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생존과 관계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되면 누구라도 성장에 정성을 쏟는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세포분열을 통해 계속 성장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생명력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생명력을 성공이란 이유로 가둬 버리고 나면 결국 몸살을 앓다가 생명력을 잃고 서서히 꺼져갈 뿐이다. 건강염려증을 달고 살았던 고흐는 그림을 통해 출세하려는 현실적인 나약함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서는 말라빠진 나무라 해도 반드시 꽃을 피우는 그 생명력을 소망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꽃나무들’이다. 만일 현실에서 생존 욕구, 관계 욕구, 성장 욕구가 적절하게 채워졌다면 고흐는 분명 그 생명력을 더 강렬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복숭아나무'의 분홍 꽃들이 어떻게 보일까? 생명력일까? 아니면 매혹적인 성공일까? 만난 적도 없는 친구들의 명수로 우리의 웹페이지를 자랑하거나 호화로운 음식들로만 장식한다면 우리도 곧 몸살을 앓을 것이다. 자, 더 늦기 전에 겨울 찬바람에도 얼어 죽지 않는 저 강한 생명의 불꽃에 우리의 정성을 모으자.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