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전도(국보). 마치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려진 전도(全圖) 형식의 그림으로, 조선 사람들이 금강산을 그릴 때 가장 선호했던 방식이다. 이 같은 형식의 그림을 통해 금강산을 가본 사람은 여행의 추억을 회고할 수 있었고, 가보지 못한 사람은 봉우리와 골짜기 곳곳을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겸재가 50대에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 결과들은 70대에 그렸다고 추정하고 있다. /개인소장
금강전도(국보). 마치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려진 전도(全圖) 형식의 그림으로, 조선 사람들이 금강산을 그릴 때 가장 선호했던 방식이다. 이 같은 형식의 그림을 통해 금강산을 가본 사람은 여행의 추억을 회고할 수 있었고, 가보지 못한 사람은 봉우리와 골짜기 곳곳을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겸재가 50대에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 결과들은 70대에 그렸다고 추정하고 있다. /개인소장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가장 아름다운 산.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금강산은 그런 이상향의 장소였다. 하지만 금강산 여행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시간과 체력이 절대적이었다. 한양(서울)을 출발해 금강산과 인근 명승지를 둘러보려면 최소 한 달이 걸렸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막대한 여행 경비였다. 그럼에도 선비들은 마치 성지를 순례하듯 재산을 털어 금강산으로 향하고 또 향했다. 그렇게 금강산을 다녀온 선비들도 겸재 정선(1676~1759)의 ‘금강전도’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겸재의 작품을 감상하는 게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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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가 남긴 수많은 금강산 진경산수화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금강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하늘에서 내려다본 형식으로 묘사한다. 그만큼 겸재가 금강산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잘 잡아내 탁월한 실력으로 표현했다는 찬사다.

국민 화가, 조선의 화성(畵聖·그림의 성자), 조선 회화의 전성기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인왕제색도’를 그린 진경산수화의 대가. 이렇듯 겸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그의 작품은 교과서와 1000원권 지폐 등 일상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수묵 풍경화 외에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겸재 정선’은 우리가 몰랐던 겸재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창립 60주년을 맞은 삼성문화재단이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공동 기획한 전시다. 리움미술관과 간송미술관은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등 유수의 박물관 19곳에서 작품을 빌려온 덕분에 국보·보물로 지정된 정선 작품 12건 중 8건(국보 2건, 보물 6건)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작품 수는 총 165점으로 역대 가장 방대한 규모의 겸재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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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畵로 인생 역전…"東國 100년, 겸재만 한 솜씨 없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18세기 조선 대표 화가 겸재 정선

박생연. 개성 대흥산 대흥산성 밖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박연폭포인데, 박생연은 박연폭포의 다른 이름이다. 작품 속 박연폭포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폭포 우측에 솟구쳐 오른 암봉은 독수리가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는 박진감 넘치는 자태로 화면에 긴장감을 준다. 폭포 아래에 범사정이 있고, 갓 쓴 선비 세 사람이 두 명의 시동을 거느리고 단풍 든 폭포를 감상하고 있다. 리움미술관은
박생연. 개성 대흥산 대흥산성 밖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박연폭포인데, 박생연은 박연폭포의 다른 이름이다. 작품 속 박연폭포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폭포 우측에 솟구쳐 오른 암봉은 독수리가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는 박진감 넘치는 자태로 화면에 긴장감을 준다. 폭포 아래에 범사정이 있고, 갓 쓴 선비 세 사람이 두 명의 시동을 거느리고 단풍 든 폭포를 감상하고 있다. 리움미술관은 "마치 폭포의 소리까지 들리는 듯한 실감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몰락한 가문에서 어머니와 동생을 돌보며 끼니를 걱정하는 소년 가장. 조선 최고의 화가이자 오늘날 ‘국민 화가’로 불리는 겸재 정선(1676~1759)의 시작은 초라했다.

겸재는 1676년(조선 숙종 2년) 한성부 순화방(현재 서울 청운동)의 쇠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양반 사회는 모든 게 과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겸재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부터 3대가 연속으로 과거에 낙방했으니 형편이 어려워지고 가문의 명예도 땅에 떨어진 건 당연했다. 겸재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조지윤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겸재와 가족들은 같은 동네에 사는 외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어렵게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인곡유거(경교명승첩, 보물).겸재 정선이 살았던 인왕산의 집 이름을 그린 작품이다. 겸재는 종로구 청운동 89번지의 유란동에서 태어나 50대까지 살았고, 그 이후 이 인곡정사로 이사해 평생을 지냈다. ㄱ자 형태로 꺾이는 집의 모서리방에 도포를 입은 선비가 서책이 쌓인 곁에서 책을 펴놓고 앉아 있는데, 겸재의 자화상으로 평생 문인이고 싶었던 그의 바람이 표현된 중요한 예이다. /간송문화미술재단
인곡유거(경교명승첩, 보물).겸재 정선이 살았던 인왕산의 집 이름을 그린 작품이다. 겸재는 종로구 청운동 89번지의 유란동에서 태어나 50대까지 살았고, 그 이후 이 인곡정사로 이사해 평생을 지냈다. ㄱ자 형태로 꺾이는 집의 모서리방에 도포를 입은 선비가 서책이 쌓인 곁에서 책을 펴놓고 앉아 있는데, 겸재의 자화상으로 평생 문인이고 싶었던 그의 바람이 표현된 중요한 예이다. /간송문화미술재단
청년 겸재는 간절히 성공을 원했다. 보란 듯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을 잔반(殘班·몰락 양반)이라 무시하던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과거에 합격할 만큼 뛰어난 ‘공부 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겸재가 택한 건 그림의 길이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끊임없이 그림 실력을 갈고닦았다. 환쟁이(화가의 멸칭) 따위 천한 일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36세가 되던 1711년, 마침내 겸재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금강산 근처의 고을에서 현감으로 재직하던 오랜 친구 이병연이 겸재를 금강산 여행에 초대했고, 같은 동네에 살던 후원자 신태동이 비용을 댄 것. 이 덕분에 겸재는 금강산과 인근 지역을 여행하며 최고의 그림 소재를 모을 수 있었다. 겸재는 그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화첩으로 묶은 뒤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 해악전신첩이라 이름 지었다.
금강내산(해악전신첩, 보물). 해악전신첩이란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을 말한다. 1712년 겸재가 발표한 이 화첩은 그의 이름이 조선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다만 당시 겸재가 그린 화첩은 사라졌다. 대신 겸재는 72세였던 1747년 금강산을 한 번 더 여행한 뒤 해악전신첩을 다시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금강내산(해악전신첩, 보물). 해악전신첩이란 '바다와 산의 정신을 담은 화첩'을 말한다. 1712년 겸재가 발표한 이 화첩은 그의 이름이 조선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다만 당시 겸재가 그린 화첩은 사라졌다. 대신 겸재는 72세였던 1747년 금강산을 한 번 더 여행한 뒤 해악전신첩을 다시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풍악내산총람(보물). 인왕제색도가 빠진 뒤 5월 7일부터 전시될 예정인 작품이다. 금강산의 독특한 지형적 특징을 섬세한 필치와 색채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험준한 바위산과 부드러운 흙산, 형형색색의 단풍 등이 어우러져 64세 무렵 완숙한 경지에 이른 정선의 채색 기량을 만끽할 수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풍악내산총람(보물). 인왕제색도가 빠진 뒤 5월 7일부터 전시될 예정인 작품이다. 금강산의 독특한 지형적 특징을 섬세한 필치와 색채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험준한 바위산과 부드러운 흙산, 형형색색의 단풍 등이 어우러져 64세 무렵 완숙한 경지에 이른 정선의 채색 기량을 만끽할 수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겸재가 그린 해악전신첩에 담긴 탁월한 솜씨를 본 사람들의 입은 떡 벌어졌다. 문인들은 겸재의 재능에 앞다퉈 찬사를 보냈고, 그림 의뢰가 쏟아졌다. 한순간에 ‘스타 화가’로 떠오른 것이다. 사회적 명사가 된 겸재는 41세가 되던 1716년 봄, 마침내 추천을 받아 종 6품(18품계 중 12등급)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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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관료로 승승장구했다. 맡은 직무는 훌륭히 해냈고, 지방관으로 파견을 나갔을 때도 선정을 펼친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린 영조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조 즉위 후 그는 더욱 빠르게 승진을 거듭했고, 세상을 떠나던 84세에는 종 2품(18품계 중 4등급)인 동지중추부사 자리까지 올랐다. 사후에는 영조의 지시에 따라 정2품(18품계 중 3등급)인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추증받았다. 그림으로 일궈낸 창대한 ‘인생 역전’이었다.

그러면서도 겸재는 그림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한양(서울)의 풍경과 자신이 부임한 전국 각지의 명승지를 그리며 그림 실력을 끝없이 다듬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붓질, 생략과 강조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주제를 부각하는 구성, 장르와 주제를 가리지 않는 탁월한 표현력…. 작품을 1000점 넘게 남길 정도로 다작(多作)한 덕분에 겸재의 그림에서는 세월이 흐를수록 깊은 맛이 배어 나왔다.
여산초당(보물).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의 여산초당을 그린 것이다. '여산초당기'에 묘사된 글을 읽고 겸재가 그린 것으로, 정선 특유의 대담하고 짙푸른 수묵 등 그의 진경화풍이 확립된 70대중반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6월 1일까지 전시되며 이후 '여산폭'으로 교체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여산초당(보물).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의 여산초당을 그린 것이다. '여산초당기'에 묘사된 글을 읽고 겸재가 그린 것으로, 정선 특유의 대담하고 짙푸른 수묵 등 그의 진경화풍이 확립된 70대중반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6월 1일까지 전시되며 이후 '여산폭'으로 교체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사선정(해악전신첩, 보물). 사선정은 강원도 고성군의 삼일포 또는 삼일호라고 불리는 호수의 중앙에 있는 큰 바위섬에 세워진 정자다. 대담한 화면 구성과 추상적으로 변한 화풍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사선정(해악전신첩, 보물). 사선정은 강원도 고성군의 삼일포 또는 삼일호라고 불리는 호수의 중앙에 있는 큰 바위섬에 세워진 정자다. 대담한 화면 구성과 추상적으로 변한 화풍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오늘날 그는 조선 회화의 황금기인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선의 자연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꼽힌다. 그의 작품은 이후 모든 조선 화가의 모범이 됐다. 18세기 이후 제작된 지도에 나오는 나무들이 모두 겸재 정선의 화풍으로 그려진 게 이를 방증한다. 동시대 문인 박사석은 겸재를 이렇게 평가했다.

“세상에서 명화라면 반드시 겸재를 지목하는데 (중략) 동국(東國) 백년에 이런 솜씨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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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富村 청운동, 압구정은 시골
겸재의 그림 속 한양 집중화

압구정(경교명승첩, 보물). 친구였던 이병연의 시와 겸재의 그림을 합친 작품이다. 서울 압구정동 일대의 옛 모습으로, 현재 동호대교 옆 압구정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해당하는 자리다. 강변을 따라 높은 언덕이 줄지어 있고, 주변에 기와집과 초가집이 그려져 있다. 가장 끝 언덕 위 높이 지어진 큰 기와집이 한명회가 건립한 정자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압구정(경교명승첩, 보물). 친구였던 이병연의 시와 겸재의 그림을 합친 작품이다. 서울 압구정동 일대의 옛 모습으로, 현재 동호대교 옆 압구정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해당하는 자리다. 강변을 따라 높은 언덕이 줄지어 있고, 주변에 기와집과 초가집이 그려져 있다. 가장 끝 언덕 위 높이 지어진 큰 기와집이 한명회가 건립한 정자다. /간송미술문화재단
평생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1000점 넘게 그린 만큼 겸재 정선의 작품에는 조선의 사회상이 그대로 녹아 있다. 대표적인 게 ‘한양 집중화’ 현상이다.

너도나도 서울에 목을 매는 분위기는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자식들에게 “반드시 한양에 꼭 붙어 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마라”고 신신당부하고, 실학자 서유구(1764~1845)는 “요즘 벼슬하는 사람들은 성문 밖 땅을 하루도 살 수 없는 더러운 땅쯤으로 생각하는데, 벼슬길이 끊어져도 후손들은 한양에서 한 발짝도 나가려 하지 않는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청풍계(장동팔경첩). 장동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일대로, 정선이 태어나 평생 살았던 곳이었다.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에 있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부르는 이름이다. 장맛비 그친 여름날의 경치인 듯, 주변의 자연이 물기에 젖어 온통 짙푸르게 표현됐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청풍계(장동팔경첩). 장동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일대로, 정선이 태어나 평생 살았던 곳이었다.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에 있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부르는 이름이다. 장맛비 그친 여름날의 경치인 듯, 주변의 자연이 물기에 젖어 온통 짙푸르게 표현됐다. /간송미술문화재단
겸재의 집안이 전형적인 사례였다. 벼슬길이 끊어졌는데도 한양, 그것도 가장 부자 동네인 북악산 밑에 살았다. 당시 북악산·인왕산 일대(현재 청운동·효자동)는 ‘장동’이라 불렸는데, 궁궐이 가깝고 시내 조망이 좋은 데다 경치가 아름다워 고관대작들이 가장 선호하는 동네였다. ‘장동팔경첩’에 그 풍경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겸재는 부자 동네에 사는 효과를 톡톡히 봤다. 가난했지만 동네에 사는 친척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고, 어린 시절 사귄 부잣집 친구들과 안면을 익혀 놓은 이웃들은 훗날 든든한 뒷배이자 고객이 돼줬다. 이들은 겸재에게 자신의 집과 정원을 그려달라고 주문했는데, 이런 한양의 집 그림을 사가도(私家圖)라고 한다. 이번 전시에는 정3품 관료 이춘제(1692~1761)를 위해 그린 ‘서원소정도’를 비롯해 여러 사가도가 나와 있다.
사직송. 겸재가 노송 한 그루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작품으로, 실제 사직단에 있는 소나무를 그린 것이다. 선물용이나 판매용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사직송. 겸재가 노송 한 그루만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작품으로, 실제 사직단에 있는 소나무를 그린 것이다. 선물용이나 판매용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다만 수도권 내 땅값 기준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지금 가장 비싼 강남과 한강에 인접한 동네들은 대체로 미개발 상태였다. 당시 압구정동 일대를 그린 ‘압구정’(현재 압구정 현대아파트 자리)은 사람 사는 동네라기보다는 자연 관광지에 가깝다.

조선 유일 무지개를 그리다…수묵화 巨匠은 '색채의 마술사'
겸재 정선 특별전 주요 작품 5선

165점에 달하는 방대한 출품작에는 겸재 정선의 다양한 매력과 인간적인 면모가 담겨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핵심 작품 다섯 점을 꼽았다.
인왕제색도(국보). 76세에 평생을 쌓아온 진경산수화의 대가다운 기량을 펼친 대작이다.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개이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산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5월 6일까지 전시된 이후 미국 순회전을 떠나는데, 당분간 국내에서 작품 감상이 어려울 예정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건희 회장 기증
인왕제색도(국보). 76세에 평생을 쌓아온 진경산수화의 대가다운 기량을 펼친 대작이다.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개이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산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5월 6일까지 전시된 이후 미국 순회전을 떠나는데, 당분간 국내에서 작품 감상이 어려울 예정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건희 회장 기증
① 인왕제색도: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는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화가다. 진경산수화란 우리나라 산천을 사실적이고 개성적인 필치로 그린 회화다. 이전에도 한반도 풍경을 그린 화가는 있었지만 겸재와 같이 탁월한 수준과 왕성한 작품 활동을 통해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화가는 없었다. 국보이자 ‘이건희 컬렉션’의 대표 작품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는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을 그린 작품이다. 그의 진경산수화풍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75세 때 그렸다. 겸재의 기량이 나이가 들며 퇴보하기는커녕 더욱 원숙해졌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사문탈사(경교명승첩).
사문탈사(경교명승첩).
② 사문탈사: 색채의 마술사

유학자이지만 불교에도 조예가 깊던 율곡 이이(1536~1584)가 눈 오는 날 소를 타고 절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주목할 만한 건 벽을 메운 분홍빛이다. 단조로운 무채색 위주였을 그림이 봄을 예고하는 분홍빛으로 화사해졌다. 조지윤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당시 조선에서 분홍색을 쓴 화가는 겸재뿐이었다”며 “겸재만큼 화려하고 다채로우면서도 과하지 않게 색을 잘 쓴 화가는 보기 드물다”고 말했다. ‘여산초당’ 속 붉은색과 분홍색, ‘금강전도’의 푸른 하늘도 주목할 만하다. 흑백 수묵화의 거장으로만 알던 정선은 사실 ‘색채의 마술사’였다.
독서여가도(경교명승첩, 보물). 겸재의 자화상으로 추정된다. 선비의 휴식하는 모습을 맑은 필치로 그려낸 이 작품은 겸재의 흔치 않은 인물화 중 하나다. /간송미술문화재단
독서여가도(경교명승첩, 보물). 겸재의 자화상으로 추정된다. 선비의 휴식하는 모습을 맑은 필치로 그려낸 이 작품은 겸재의 흔치 않은 인물화 중 하나다. /간송미술문화재단
③ 독서여가도: 성공한 선비의 자화상

인간 정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전시를 기획한 조지윤 실장은 “목표지향적인 면모가 강했다”고 했다.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재능과 강력한 의지력만으로 벼슬길에 올라 집안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이자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그의 여러 작품에 드러나 있다. 자화상인 독서여가도가 대표적이다. 흔치 않은 그의 인물화로, 그림 속 겸재가 검소한 기품을 풍기는 선비의 모습으로 책이 가득한 서재 툇마루에 앉아 있다.
계상정거(퇴우이선생진적첩, 보물). 퇴우이선생진적첩은 이황이 서문을 쓴 뒤 송시열이 발문을 썼고, 겸재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 정선의 둘째 아들의 발문이 합쳐진 화첩이다. 세대를 넘어 완성된 이 화첩에는 정선 집안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이황의 손자의 딸의 외손자가 겸재다. 겸재는 생전 자신이 이황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삼성문화재단 소장
계상정거(퇴우이선생진적첩, 보물). 퇴우이선생진적첩은 이황이 서문을 쓴 뒤 송시열이 발문을 썼고, 겸재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 정선의 둘째 아들의 발문이 합쳐진 화첩이다. 세대를 넘어 완성된 이 화첩에는 정선 집안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이황의 손자의 딸의 외손자가 겸재다. 겸재는 생전 자신이 이황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삼성문화재단 소장
전시장에서는 퇴계 이황(1501~1570)의 도산서당(현 도산서원)을 그린 ‘계상정거’도 만날 수 있다. 1000원권 화폐 뒷면에 그려진 그림으로 눈에 익은 작품이다. 겸재는 늘 자신이 이황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정선의 가계도에서 7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황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홍관미주도(경교명승첩).
홍관미주도(경교명승첩).
④ 홍관미주도: 이병연과의 브로맨스

당대 유명한 시인인 이병연(1671~1751)은 겸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다섯 살 터울인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한 동네 친구였다. 둘은 평생 가까이 지내며 서로를 도왔고, 시와 그림을 주고받았다. 함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겸재의 그림에 이병연이 시를 붙이는 식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이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경교명승첩’이다. 이 작품은 이병연이 보낸 시를 주제로 겸재가 그림을 그려 만들었다. 돛단배를 타고 가는 두 사람 뒤로 겸재와 이병연의 우정을 상징하는 듯한 영롱한 무지개가 걸려 있는데, 조선시대 그림 중 무지개를 그린 것으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요화하마도.
요화하마도.
⑤ 요화하마도: 겸재가 이런 그림도?

겸재는 평생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그렸다. 꽃과 새, 동물을 그린 화조영모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속에는 한여름 풀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다가 무언가 발견한 듯 집중한 개구리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개구리는 펄쩍 뛰어오르는 성질 때문에 입신양명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이 작품은 인기 화가이던 겸재가 주변 사람의 부탁을 받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장르는 다르지만 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해 대상의 고유한 특징을 표현한다는 겸재의 특징은 여전하다.

호암미술관에서 전시…금옥당 양갱 곁들여요

봄은 경기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굽이굽이 들어가는 길부터 시작해 미술관 앞산을 병풍처럼 두른 벚나무는 미술관을 ‘수도권 최고의 벚꽃 명소’로 만들었다. 여기에 전통 정원인 미술관 부속 정원 ‘희원(熙園)’까지 감상하면 정선이 그린 한국의 아름다움 속에 녹아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매일 오후 1시와 3시에 무료 희원 도슨트(30분)가 운영되니, 오후 2시와 4시에 열리는 전시 설명 도슨트(50분)에 맞춰 일정을 짜면 좋다.
봄의 호암미술관 전경.
봄의 호암미술관 전경.
전시마다 열리는 팝업 카페 덕분에 호암미술관의 명물로 자리 잡은 ‘프로젝트룸’ 공간은 이번에 양갱 전문 브랜드 금옥당이 차지했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테리어 속에서 정선의 그림으로 장식된 양갱 세트를 즐길 수 있다.

관람 편의를 위해 무료 셔틀버스도 운영된다.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을 연결하는 셔틀버스가 매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2회씩 운행한다.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할 수 있다.

용인=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