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신관에서 다음달 22일부터 열리는 ‘55주년: 한국 현대미술의 서사 2부’ 전시. 이승택의 ‘비조각’ 캔버스 연작과 ‘옹기’ 사이로 백남준의 로봇 조각 ‘프랑켄슈타인’이 보인다.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다음달 22일부터 열리는 ‘55주년: 한국 현대미술의 서사 2부’ 전시. 이승택의 ‘비조각’ 캔버스 연작과 ‘옹기’ 사이로 백남준의 로봇 조각 ‘프랑켄슈타인’이 보인다.
미술에도 시대정신이 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독창적 세계관을 제시한 작가가 위대한 예술가로 이름을 남기는 것처럼, 세월이 흘러도 명문 취급을 받는 화랑의 조건도 비슷하다. 한발 앞서 시대의 변화를 포착하고,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이는 화랑만이 작가와 컬렉터의 선택을 받기 마련이다.

해방 후 한국미술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1세대 모더니스트들이 서양 미술을 소개하고, 세계 미술계와의 간극을 줄이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시간이 흘러 세기 전환기를 앞둔 1990년대 들어선 세계 미술을 선도하는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미술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 과제에 도전한 건 당대 서양 첨단 작업에 영향을 받은 실험·개념 미술가들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세계를 누빈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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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의 2막도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한국 미술시장의 산파 역할을 한 박명자 회장이 2006년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전부터 경영에 관여해온 둘째 아들 도형태 갤러리현대 부회장(56)이 전면에 등장하며 세대교체에 시동을 걸었다. 미국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백남준과 교분을 나눈 도 부회장은 ‘한국 실험미술 다시 보기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다음달 22일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개막하는 55주년 특별전의 2부 전시가 도 부회장의 취향이 담긴 실험미술, 디아스포라 작품으로 채워진 이유다. 전시는 작가 12명의 작품 180여 점을 선보인다.

곽덕준: 디아스포라 실험

곽덕준 ‘대통령과 곽’ 연작 10점을 관람하는 모습. /갤러리현대 제공
곽덕준 ‘대통령과 곽’ 연작 10점을 관람하는 모습. /갤러리현대 제공
신관 지하에 걸린 곽인식(1919~1988)과 곽덕준(88)의 작품이 관람의 시작을 알린다. 두 작가는 한국 실험미술 선구자인 동시에 일본에서 작업 활동을 한 ‘재일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공유한다. 전시에선 곽덕준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1966년부터 3년여간 제작한 페인팅은 평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고 기모노를 염색하는 방식으로 색을 심은 게 특징이다. 이는 재일한국인으로 겪은 냉소와 조롱을 견디려는 씁쓸한 유머를 담고 있다. 미국 타임지 표지에 실린 미국 대통령 사진을 자기 얼굴과 담아낸 사진 연작 ‘대통령과 곽’도 큼지막하게 걸렸다. 제럴드 포드부터 버락 오바마까지 작업했는데, 10개 작품을 모두 소장한 미술관이나 갤러리는 갤러리현대밖에 없다.

성능경: ‘신문읽기’ 2025 ver.

한국 아방가르드(전위) 예술을 대표하는 성능경(81)은 갤러리현대가 백아트, 리만머핀과 함께 발굴해낸 흙 속의 진주 같은 작가다. 팔순 넘어 생애 세 번째 상업화랑 전시를 갤러리현대에서 진행한 그는 지난해 미국 뉴욕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가장 대표적 작업인 ‘신문읽기’가 새롭게 재해석돼 걸렸다. 지난해 12월 벌어진 계엄령 사태가 대서특필된 종이신문을 읽은 결과물을 새롭게 내놓은 것. 이 작업을 통해 역사의 증인으로 살고자 하는 예술관을 집약적으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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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택과 백남준: 예술을 대하는 태도

전시장 2층에는 이승택(93)의 ‘비조각’ 캔버스 연작이 벽면을 메웠다. 팔순을 넘긴 2015년 버려진 물건과 골동품상에서 수집한 오브제적 재료로 제작한 시리즈로, 건너편에 자리 잡은 백남준(1932~2006)의 로봇 조각 ‘프랑켄슈타인’과의 대비가 재밌다. 이승택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태도로 사라져가는 전통 민속적 물건을 현대미술로 승격시키려 했다면, 백남준은 첨단 기술을 사용해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려 하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건용과 이강소: 사유의 순간

이건용 ‘Bodyscape 76-1-2025’, 2025,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91×117㎝.
이건용 ‘Bodyscape 76-1-2025’, 2025,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91×117㎝.
이강소 ‘바람이 분다 240932’, 2024,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62×130㎝.
이강소 ‘바람이 분다 240932’, 2024,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62×130㎝.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1층에 걸린 이강소(82)와 이건용(83)의 회화 작품이다. 한국 실험미술의 거장이자 미술시장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두 작가의 신작이 나란히 걸린다. 1970년대를 전후해 실험미술이 전국적 규모로 확장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두 작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강소가 ‘실존하는 세계는 고정돼 있지 않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순간순간 직관에 따라 그림을 그려 무한대로 열린 해석의 공간을 관람객에게 내준다면, 이건용은 논리적인 의도를 갖고 엄격하게 의도와 표현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갤러리현대 관계자는 “회화를 대하는 태도는 정반대지만, 평생 미술로 사유하려 한 두 대가의 내공을 한 공간에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