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갤러리 서울에 전시된 백남준의 비디오조각 ‘볼타’(왼쪽)와 판화 연작 ‘진화, 혁명, 결의’.
리안갤러리 서울에 전시된 백남준의 비디오조각 ‘볼타’(왼쪽)와 판화 연작 ‘진화, 혁명, 결의’.
비디오 아트 거장 백남준(1932~2006)의 예술세계는 넓었다. 1960년대에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 미술가 요셉 보이스 등과 플렉서스 그룹에서 활동하며 미술, 퍼포먼스, 음악, 이벤트를 넘나드는 전위적 예술을 선보였다. TV는 물론 컴퓨터와 각종 과학기술까지 동원해 이후의 미디어 아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설치미술 범위를 확장한 ‘비디오 설치’ 작품은 당대의 첨단 기기는 물론 영상, 회화, 글씨,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를 망라했다.

회화, 판화, 드로잉 등 백남준이 남긴 평면 작업들을 비디오 설치 작품과 함께 만날 수 있는 전시가 두 곳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 서울의 백남준 개인전과 서울 한남동에 지난 3일 이전 개관한 ‘BHAK’(옛 박영덕화랑)의 개관 기념전 ‘더 히스토리(The History)’다.

백남준의 1994년작 ‘무제’.
백남준의 1994년작 ‘무제’.
리안갤러리 서울의 백남준 개인전은 회화와 판화 등 비디오 아트에서 영감을 받은 평면 작업에 주목했다. 전시 작품 27점 가운데 회화와 판화가 16점, 백남준과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의 협업 퍼포먼스를 촬영한 임영균의 사진 작품 8점 등 24점이 평면 작품이다.

1989년작 ‘진화, 혁명, 결의(Evolution, Revolution, Resolution)’는 구형 텔레비전과 라디오 케이블을 이용해 높이 3m의 비디오 조각으로 제작한 ‘혁명가 가족 로봇’ 시리즈를 판화로 만든 것이다. 각각의 로봇에는 프랑스 혁명과 관련돼 비극적 종말을 맞은 마라, 로베스피에르, 당통, 디드로 등의 제목이 붙어 있다. 각 로봇 이미지에는 ‘암살’(마라), ‘혁명은 폭력을 정당화하느냐’(로베스피에르) 등의 인물 특성을 반영한 글이 적혀 있다. 디드로에게 붙인 ‘여씨춘추(呂氏春秋) 일자천금(一字千金)’은 그가 21년 만에 완성한 최초의 백과사전인 《백과전서》에 대한 헌사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판화 ‘올림픽 센테니얼(Olympic Centennial)’은 비디오 아트에서 영향받은 모티브들과 한글, 영어, 한자 메모로 이뤄진 작품이다. 오방색 배경 위에 사람 형상이나 눈, 코, 입이 있는 텔레비전 형상을 그린 ‘무제’(1994)를 비롯해 한국적인 오방색과 색동무늬에서 받은 영감을 평면 작업에 반영한 작품도 여럿이다.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가인 백남준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적 화랑인 미국 가고시안갤러리에서 55만달러에 내놓은 백남준 작품이 국내에서는 20만달러 이하에 나온다”고 안타까워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6일까지.

서울 한남동 BHAK에 전시된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 작품 ‘정지용’(1996).
서울 한남동 BHAK에 전시된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 작품 ‘정지용’(1996).
박영덕화랑에서 이름을 바꾼 BHAK는 서울 청담동에서 한남동으로 이전 개관하면서 첫 전시로 백남준을 선택했다. 창업자인 박영덕 전 대표가 전담 갤러리스트로서 인간 백남준의 역사를 10여 년간 함께했던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개관 기념전 ‘더 히스토리(The History)’는 지상 1층에서는 이우환, 김창열, 윤명로, 페르난도 보테로, 이승조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지하 1층을 백남준 작품 33점으로 채웠다. 그중 평면 작업이 페인팅 4점, 드로잉 4점, 판화 12점 등 20여 점이다.

비디오 설치 작품인 ‘노스탤지어 이즈 익스텐디드 피드백(Nostalgia is Extended Feedback’(1991)과 ‘정지용’(1996)을 비롯해 그동안 국내에서 쉽게 접하지 못했던 백남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평면 작업은 7개의 LP판에 그림과 한자, 숫자 등을 채워넣은 ‘NJP at 1800 RPMs’(1992), 종이에 크레용으로 물고기, 사람 얼굴, 집 등을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그린 ‘무제’ ‘희로애락’ 등 4점의 회화 연작,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손부처’ ‘한자 바리에이션’ 등 석판화 12점, 신문지에 유화물감과 크레용으로 그린 작품 4점,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궁상각치우’ 등 다양하다.

1993년 박영덕 전 대표가 설립한 BHAK는 이전 개관과 함께 박종혁 대표의 2세 경영체제로 전환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박영덕화랑은 1990년대부터 미국 프랑스 독일 등 해외 주요 아트페어에 참가해 국내 작가들의 세계 무대 진출을 도왔다.

박종혁 대표는 “청담동 시절에도 그랬던 것처럼 신진 작가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코로나 시대에 온라인 비중이 커지더라도 오프라인과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백남준 전시는 오는 19일, 나머지 전시는 31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