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de, 2009.
Nude, 2009.
물결은 반짝이고, 숲은 아득하다. 폭포는 눈부시고, 설경은 눈이 시리다. 목탄으로 그어놓은 듯한 선들은 자세히 보면 제멋대로 자란 나뭇가지다. 희뿌연 화면 안엔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는 화사한 봄이 숨어 있다.

이 장면들은 40년간 오직 아날로그 흑백사진만 고집해온 사진가 민병헌(68)의 세계에서 존재한다. “흑백 사이에 있는 회색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단계의 색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작품들은 때론 쓸쓸하고, 때론 화려하다. 거칠면서 담백하고, 웅장하면서 소박하다.

셀 수 없는 무한한 회색. 이 미묘한 색을 사람들은 ‘민병헌 그레이(grey)’라고 부른다. 그의 40년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60여 점이 서울 성수동 갤러리 구조에 걸렸다. 지난달 30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모두가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요즘의 ‘사진’과 과거의 ‘사진’은 그 정의조차 달라졌지만, ‘사실을 재현한다’는 본질적인 의미를 잊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민병헌 그레이’의 시작

사진작가 민병헌
사진작가 민병헌
그는 아날로그 카메라를 고집한다. 카메라로 대상을 포착하는 순간부터 암실에서 완성작이 나올 때까지 타인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한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연출이나 조작 없이 본 대로 찍고, 느낀 대로 인화했다. 연작 시리즈 ‘짙은 안개’ ‘강’ ‘스노우랜드’ ‘폭포’ ‘하늘’ ‘몸’ ‘이끼’ 등이 그렇게 나왔다. 그의 작품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시카고 현대미술관, 휴스턴미술관, 프랑스 국립조형예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그는 20대에 아마추어 사진가로 시작했다. 군 제대 후 뒤늦게 사진을 독학했다. 그저 사진에 반해 서울 곳곳을 돌며 풍경들을 찍었다. 1987년 길바닥만 찍은 ‘별거 아닌 풍경’은 독특한 시선과 빛의 미학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흑백사진을 고집하게 된 건 사진 작업을 하는 모든 과정에 남의 손이 닿는 게 싫어서였다. 그는 카메라 렌즈로 그 순간 자신이 본 장면을 사각의 프레임 안에 잘라 넣고, 현상과 인화 과정에서 온도와 시간을 통제하는 것까지를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온전히 혼자 할 수 있는 게 흑백사진이었다.

고독과 인내의 시간을 살다

그의 두 뺨은 늘 발갛다. 설경을 찍느라, 안개 낀 숲을 헤매고 다니느라, 암실에서 평생을 화학물질과 씨름하느라 그랬으리라. 민 작가는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는 실수를 용인하지 않는다고 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는 걸 알려주는 매개체다. 디지털 작업처럼 있는 걸 지우고,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늘 본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는 같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40년을 살았다.

그의 작품들에는 어느 곳에서 찍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일련번호와 프린트 사이즈, 언제 찍었는지에 대한 정보만 있다. 사진에 특정한 메시지를 주기보다 그 순간에 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게 작가의 말이다.

타협하지 않았다, 암실이 싫어질까봐

일흔을 앞둔 그는 지금도 군산의 작업실을 기반으로 홀로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 홀로 암실에 들어간다. 보조 스태프 없이 대형 롤링 인화지에 현상하는 작업은 ‘죽을 것처럼 힘든 노동’이라고 했다. 요즘은 인화지를 구하기도 어려워 사진을 찍어놓고 1~2년씩 기다렸다 작업하기도 한다. 필름 작업을 위해 온갖 약품들 사이에서 밤샘 작업을 하고 나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날이 부지기수다.

그의 작품에는 길이 123㎝를 넘는 대형작이 없다. 약품 속에 몇 번 들어갔다 오면 이리저리 구겨지고 말려 들어가기 때문에 홀로 작업할 수 있는 최대 사이즈가 지금의 작품 크기다. 해외 전시와 페어 등에서 주목받으면서 여러 유혹도 있었다. 호텔이나 대형 건물 로비에 걸 수 있게 이미지만 산 뒤 대형 사이즈로 특수 인화해 로열티를 주겠다는 제안도 여러 번 받았다. 작가로서 명성을 얻으며 편안하게 경제적 여유를 얻을 기회여서 고민했지만, 그의 대답은 항상 ‘노’였다.

“왜 고민하지 않았겠어요. 부와 명예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길인데요. 근데요, 한번 받아들이면 죽을 때까지 암실에 다신 안 들어가고 싶을 것 같았어요. 한순간 눈이 멀어 모든 걸 멈추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