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1930년대 초부터 프랑스 미술 역사가인 크리스티앙 제르보스와 함께 자신의 작품을 정리했다. 작품들을 연대기별로 분류하고 알기 쉽게 정리한 결과가 33권짜리 ‘파블로 피카소, 제르보스’ 전집(사진)이다. 어린 시절 피카소가 그린 드로잉 등을 포함해 1만6000점 이상의 작품을 담고 있다. 출판은 1932년 제르보스가 설립한 시각예술 출판사 ‘카이에다르(Cahiers d’Art)’가 맡았다.

제르보스의 이 책은 ‘컬렉터들의 소장 0순위’가 됐다. 현대 미술 운동의 결정적 전환점을 여러 세대에 걸쳐 제공한 피카소의 작품이 피카소의 손을 거쳐 담긴 책이니 두말할 것도 없다. 한정판으로 제작된 초판 가운데 한 세트가 1978년 경매시장에서 20만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제르보스의 책은 2014년 재출판됐다. 영문판 1200세트, 프랑스어판 300세트 등이다. 내용은 원본 카탈로그와 같고, 피카소 가족들과의 협업으로 일부 업데이트됐다. 80여 년 만에 다시 인쇄된 책 역시 구하기는커녕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다.

1500세트 가운데 하나를 오는 9월 2일 코엑스에서 개막하는 ‘프리즈 서울 2022’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프리즈 서울은 ‘세계 3대 아트페어’ 가운데 하나인 프리즈가 아시아 최초로 개최하는 행사다.
제르보스 책을 공개하는 프로젝트는 홍콩의 에이드리언 청 뉴월드그룹 부회장(44)의 뜻에 따라 이뤄졌다. 청 부회장은 부동산, 인프라, 호텔과 기술 사업 등을 하는 뉴월드그룹의 3세 경영자다. 그룹의 최고경영자(CEO)이자 자신이 창업한 별도 법인 K11그룹을 이끌며 홍콩의 혁신적 스타 사업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청 부회장은 2008년 예술과 커머스를 융합해 세계 최초의 ‘쇼핑-문화’를 결합한 K11 브랜드를 설립했다. 홍콩 빅토리아 하버에 복합 문화공간 ‘K11뮤제아’를 만드는 과정에서 10년 이상 100여 명의 건축가, 디자이너, 아티스트, 환경운동가들이 참여해 ‘문화의 실리콘밸리’라는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홍콩계 인사 가운데 최연소로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았다.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 글로벌 대사, 뉴욕현대미술관(MoMA) 이사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제르보스’ 33권 모두가 서울에 상륙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청 부회장의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 부회장은 프랑스의 한 출판사에 부탁해 ‘제르보스의 서울 나들이’를 이끌어냈다. 올해 출간 90주년을 맞은 제르보스를 글로벌 아트페어가 열리는 서울에 가져가 세계의 예술가와 갤러리스트, 컬렉터들이 영감을 얻길 바랐다는 게 그의 기획 의도다.

청 부회장은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에 있는 미술품 디지털 에디션 전문기업 리토, 출판사인 카이에다르, 피카소 재단에 속한 후손들과 수개월에 걸쳐 협의했다. 그는 “현대적 대작을 아시아에 소개하는 것은 K11그룹의 사명과 일치한다”며 “예술을 전파하고 문화를 인큐베이팅한다는 사명을 가진 그룹의 비전에 맞게 아시아의 예술가와 큐레이터, 수집가들이 제르보스를 통해 많은 대화를 나누고 영감을 얻기 바란다”고 밝혔다.

청 부회장은 ‘프리즈 서울’ 행사 기간 중 제르보스 출간 9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립 피카소 파리 박물관장인 세실 드브레, 스테판 아렌버그 카이에다르 CEO 등 예술 분야 귀빈을 초청했다. 비공개로 문화예술계 대규모 자선행사도 마련한다. 일반 관람객은 행사 기간 중 예약제로 제르보스를 관람할 수 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