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고 구마의 ‘숨’.
겐고 구마의 ‘숨’.
서울을 처음 찾은 해외 유력 인사들이 바쁜 일정을 쪼개가며 들르는 곳이 있다. 한남동에 있는 리움미술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오스트리아 정부 관계자들도 출국 전에 리움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리움의 현대미술 작품 컬렉션은 국립현대미술관보다 몇 수 위라는 평가를 받고, 한국 전통 유물 컬렉션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견줘 손색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한국 미술의 얼굴’이라는 리움의 저력이다.

명작들의 향연으로 유명한 리움이지만 올 들어서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들의 ‘이름값’이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거장들의 작품으로 눈 호강을 시켜줬던 리움이 30대 컴퓨터 예술가의 애니메이션 작품(이안 쳉: 세계건설)과 젊은 국내 작가들의 실험적 작품(아트스펙트럼 2022)을 대거 소개하면서다. 신선한 작품과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박수를 보내는 이도 많지만 리움에서 세계적 걸작을 접해보고 싶은 사람들은 아쉽다는 반응이다. 지금 리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세계 정상급 미술관 만들겠다”

2일 리움에서 만난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리움이 세계 정상급 미술관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다. 리움은 2004년 개관 이후 관람객에게 격조 높은 작품을 선보이는 데 집중했다.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을 국민에게 소개할 수 있는 건 리움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리움 외에도 훌륭한 컬렉션을 갖춘 미술관이 여럿 생겼다. 빈미술사박물관 등 세계 최고 미술관·박물관들도 한국에 흔쾌히 작품을 빌려주고 있다. 곽 실장은 “영국 테이트모던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참신한 기획전을 자주 열어 미래 사회의 어젠다를 적극적으로 제시한다”며 “리움도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에 관한 전시를 더 자주 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리움의 기조 변화는 지금 열리고 있는 ‘구름산책자’ 전시에서 확실히 체감할 수 있다. ‘아시아 예술’을 주제로 아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리움에서 이런 유형의 기획전이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에 나온 24명(팀)의 작품 45점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미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사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다른 아시아 관련 전시들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전시회 제목에 쓰인 ‘구름’부터가 ‘미래’를 상징한다. 구름을 뜻하는 영어 클라우드는 정보기술(IT)업계에서 온갖 데이터베이스를 수용하는 곳으로 활용된다.

‘미래적’ 작품들의 향연

구름산책자 전시회장 초입에서 만날 수 있는 거대한 척추 모양의 조형물은 일본 현대건축 거장 겐고 구마(68)의 ‘숨(SU:M·2022)’이다. 주름이 잡힌 패브릭을 일본 종이접기 방식으로 접어 천장에 매달았다. 오염물질을 흡수하는 신소재로 제작한 덕분에 이 작품 하나가 자동차 9만 대의 1년 치 오염물질을 흡수할 수 있다. 리움은 “겐고 선생이 ‘아시아 사람들이 제시하는 미래’라는 전시 주제를 듣고 흔쾌히 출품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가타기리 가즈야 ‘종이 사구’
가타기리 가즈야 ‘종이 사구’
가타기리 가즈야(41)의 설치작품 ‘종이 사구’도 환경 문제에 관한 작품이다. 종이 4000여 장을 지름 25㎝, 높이 20㎝의 원기둥 형태로 말아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쌓아 올렸다. 작가가 보내온 작품의 부피는 고작 사람 몸통만 한 상자 하나. 종이 재료와 함께 일종의 ‘조립 설명서’만 들어 있었다. 큐레이터들은 설명서를 보면서 직접 종이를 접어 작품을 설치했다. 곽 실장은 “작품 제작과 운송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기오염을 최대한 줄이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했다.
에스티피엠제이 건축사무소의 ‘고요의 틈’.
에스티피엠제이 건축사무소의 ‘고요의 틈’.
가로·세로 길이가 3m, 높이 4.5m에 달하는 검은 구조물도 시선을 잡아끈다. 에스티피엠제이 건축사사무소가 펠트 재질의 재료를 쌓아서 만든 일종의 방이다. 방음 기능이 뛰어난 펠트를 사용한 덕분에 내부는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하다. 이날 작품을 둘러본 한 관람객은 “아이 공부방으로 쓰고 싶다”며 웃었다. 내부에 마련된 펠트 책상에는 인기 공상과학(SF) 작가 김초엽이 이 전시를 위해 쓴 신작이 놓여 있어 미래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아시아 최고 젊은 작가들 총집결

돈탄하의 ‘물 위의 대나무집’ 안에서 상영 중인 루양의 영상작품.
돈탄하의 ‘물 위의 대나무집’ 안에서 상영 중인 루양의 영상작품.
베트남 작가 돈탄하(43)의 신작 ‘물 위의 대나무집’은 말 그대로 대나무로 지은 수상 가옥이다. 작가는 지구온난화로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베트남 남부 주민을 위해 쉽게 만들 수 있는 수상 가옥을 고안했고, 이는 그대로 예술 작품이 됐다. 이 집 벽에 걸린 삼성전자의 고화질 LED TV에서는 중국 현대미술의 대표주자 루양(38)의 영상 작품이 상영된다. 양의 아바타가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춤을 추는 작품으로, 아시아 전통의 아름다움과 가능성이 주제다.

전시장에는 20대 작가 연진영(29)이 패딩 300벌로 만든 기둥 겸 의자 ‘패딩 기둥’, 미국 최대 독립 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단편 최고상을 받은 웡핑(38)의 영상 작품 ‘우화2’, 도넛 모양의 연기 고리를 내뿜는 A.A.무라카미의 설치작품 ‘영원의 집 문턱에서’ 등 진중한 문제의식과 참신함을 겸비한 작품들이 무수히 많다.

겐고를 제외하면 일반 관객에게 인지도가 높지 않은 작가들인데도 전시 수준은 거장들의 걸작전 못지않다는 입소문이 돌고 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전시장은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로 붐볐다. 전시는 내년 1월 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