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난 1997년 가치혁신(Value Innovation)론의 공동 창시자인 김위찬 교수의 특별강연을 통해 처음으로 가치혁신론을 접했다.


당시 삼성전자 경영진들은 '경쟁자를 잊어라' '비(非)고객을 잡아라' 등 김 교수의 생각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이를 현장에 접목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전략이론을 당장 현장에 적용하기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프로세스를 새롭게 정립하고 VI를 보완할 수 있는 각종 도구를 발굴해 '삼성화된 VI'의 기본틀을 정립했다.


고객의 니즈(needs)를 계량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된 일본 세이조대학의 간다 노리야키 교수의 '세븐 툴(7 tools)'이 대표적인 예다.


센스큐의 사례를 통해 삼성화된 VI의 노하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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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1년 말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 산하 컴퓨터시스템 사업부에 '특명'이 떨어졌다.


"일본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노트북 PC를 개발하라."


진대제 당시 디지털미디어 총괄 사장(현 정보통신부 장관)이 내린 특별지시였다.


해외 출장에서 막 돌아온 진 사장은 "국제 행사에서 다른 전자회사 CEO들은 자기 회사 최신형 노트북PC를 들고 나와 프리젠테이션을 하는데 나는 구닥다리 노트북을 썼다"며 해외에 내놔도 손색없는 노트북PC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 실험무대로 일본을 타깃으로 삼았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에서 먹히는 제품이면 미주와 유럽시장에서의 성공은 보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 사장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컴퓨터시스템 사업부는 바로 기존 센스큐의 버전업(version-up) 모델 개발에 착수했다.


핵심 프로젝트였던 만큼 개발 인력들이 총력을 기울여 기획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개발팀에서 올린 기획안은 번번이 진 사장으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모뎀 성능개선, CPU 확장, 메모리 향상 등 기존 모델에서 성능만 향상시킨 제품만 쏟아냈을 뿐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없다는게 이유였다.


결국 2002년 2월 삼성전자 사내 가치혁신 싱크탱크인 VIP센터로 공이 넘어갔다.


성능 향상에만 집착하는 엔지니어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고객의 눈에서 제품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가치혁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즉각 개발 디자인 영업 등의 여러부서 담당자들로 구성된 협업팀(CFT)이 꾸려졌다.


프로젝트명 '세투스(Cetus)'.


급선무는 일본 소비자들의 성향 파악이었다.


이를 통해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거나 고객이 관심 없어 하기 때문에 버려야 할 가치요소를 분석해 신제품의 컨셉트를 정해야 했다.


그러나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논문만 봐서는 가치 요소를 찾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 수 없었다.


팀원들은 고객의 니즈에 부합되는 제품을 포착하는 툴을 찾던 도중 일본 세이조대학 간다 노리야키 교수의 '세븐 툴(7 tools)'을 발견했다.


이는 시장조사를 기반으로 계량화된 수치를 통해 상품을 기획해 내는 도구로, 닛산자동차와 파이오니아 등 일본 기업에 적용돼 큰 성과를 올린 바 있었다.


팀원들은 당장 간다 교수를 찾아가 컨설팅을 의뢰했다.


이후 30여명의 팀원들이 일주일간 간다 교수에게 강의를 받은 뒤 본격적으로 일본 시장 조사에 들어갔다.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쓰는 일본 직장인 2백26명을 대상으로 노트북 PC 사용 성향과 삼성 노트북 PC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했다.


삼성제품에 대한 선호도는 16%로 소니(96%) NEC(96%) 등 일본 브랜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팀원들은 눈앞이 아득해 왔지만 삼성 노트북PC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핵심 프로젝트인 만큼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간다 교수의 연구팀과 CFT 팀원들은 수차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본 고객들의 입맛에 맞고 세계시장에서도 통할 제품 개발에 매달렸다.


5개월여간의 작업을 거친 뒤 CFT는 두 가지 모델을 뽑아냈다.


도킹(docking) 부분에 랜선을 꽂은 상태에서 본체의 무선랜 작업이 가능한 슬림형 노트북 PC와 본체가 분리된 상태에서 도킹에 붙어 있는 DVD롬이 독립적으로 작동되는 모델이었다.


이는 한국에 비해 무선랜 환경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일본의 사무실에 적합한 모델들이었다.


개발팀이 내놓은 기획안에 수십번 고개를 가로저었던 진 사장도 객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이 기획안은 받아들였다.


가치 요소로는 디자인 휴대성 부가기능 편리성 가격 성능 등을 도출했다.


모뎀 CPU 메모리 등 성능 향상에 매달리는 대신 무선랜 기능 강화와 배터리 사용시간에 신경을 썼다.


특히 배터리 사용시간은 기존의 평균 2시간에서 4시간으로 2배나 올려 사용자들의 편의를 강화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삼성전자의 슬림형 노트북 PC 센스큐는 2002년 말 일본시장 안착에 성공했고 미주와 유럽지역에서도 고급 노트북 PC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후 삼성전자 CEO들은 국제 행사에서 센스큐를 꺼내놓고 프리젠테이션을 하게 됐다.


이 제품은 2002년 11월 열린 가치혁신사례 발표대회에서 우수상을 탔다.


VI의 삼성화 일환으로 새로운 툴인 '세븐 툴'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다는 공이었다.


당시 발표대회에서 윤종용 부회장은 "상품개발 담당자들조차 감(感)에만 의존해오던 것을 정형화, 체계화시켜내는 방법론을 적절하게 응용했다"고 평가하며 '세븐 툴'을 다른 프로젝트에도 확대ㆍ적용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세븐 툴은 VIP센터에 들어온 모든 과제에 적용되고 있다.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