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23) 황우진 푸르덴셜생명보험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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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진(黃佑鎭-50) 푸르덴셜생명보험 사장의 어린시절은 "가난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경북 문경군 산북면 우곡리라는 "깡촌"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시골학교를 자퇴했다.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포기하고 집에 돌아온 그를 보고 부모님들이 "일손 하나 늘었다"며 기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60-70년대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이 상당수 그러했듯이 그 또한 "무작정"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급했고,더 넓은 세상을 보고픈 갈망도 있었다.
하지만 "가출 촌놈"이 머물 곳은 별로 없었다.
기껏 둥지를 튼 곳이 당시 서울 변두리의 암사동 뒷골목.벽돌공장 보조원,골프장(남성대)인부로 일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만 끼니 때우기도 만만치않은 터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던 어느날 그는 영화 속의 이야기처럼 인생의 은인 한 사람을 만난다.
우연히 나가게 된 교회에서 집사 한분을 알게 것.그 집사는 "공부가 너무 하고 싶다"는 시골청년의 말을 듣고 한달 반짜리 독서실 이용권을 끊어줬다.
고교입시를 50일 앞둔 때였다.
공부할 기회를 얻은 그는 정말 "무식하게" 공부했다.
"처음 5일간은 한숨도 자지 않았습니다. 세면장으로 가다가 졸도할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결국 그는 명문 서울고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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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입학 후부터 대학(서강대 영문과) 초창기까지는 경제적으로 평안했다.
숙식과 등록금은 입주과외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 후 복학해보니 세상은 변해 있었다.
5공 정권이 과외금지령을 발동한 것이다.
다시 '가난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이때 그가 찾은 곳은 목욕탕.수업이 없는 날엔 '밀고',틈나면 '공부하는' 때밀이 생활이 1년간 지속됐다.
"상경 후 웬만한 아르바이트는 다 해봤어요. 고생은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듭니다. 동시에 남에게 베푸는 여유는 물질보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청년기의 경험 때문인지 황 사장은 사회봉사 활동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그가 올초부터 난치병 어린이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사업인 '메이크 어 위시(Make a Wish)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은 것도 '가난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국내 보험사 CEO 가운데 유일하게 보험설계사 경력을 갖고 있는 황우진 사장.그의 첫번째 직장은 보험회사가 아닌 건설회사였다.
대학졸업 후 그는 한양건설에 들어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사현장에서 일하게 된다.
그의 업무는 프로젝트 코디네이터.현지에서 물품 구매와 공사 총무 업무를 맡았다.
하루는 사우디 현지 업체로부터 자갈을 구매할 일이 생겼다.
사우디 업체측이 제시한 금액은 톤당 32리알.구매 담당자인 그는 깎고 깎고 또 깎아 24리알까지 값을 낮췄다.
그러자 사우디 업체는 "자꾸 깎으면 당신에게 돌아갈 커미션이 줄어드는 데 그래도 깎겠냐"고 물었다.
그때까지 커미션이 뭔지를 몰랐던 그는 "아니 회사가 물건을 사는데 왜 나한테 커미션을 주냐"며 다시 흥정을 했다.
커미션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구매가격을 톤당 20.3리알까지 낮췄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 본사는 발칵 뒤집어 졌다.
이제까지 톤당 28리알씩 지불해 오던 자갈 값을 신참내기 직원이 가서 한방에 20.3리알로 낮춘 게 아닌가.
결국 사우디 현지 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가 시작됐고 여러 명이 옷을 벗게 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비슷한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결국 건설공사 현장의 '관행적 부정'을 견디지 못한 그는 입사 2년만에 사표를 던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두 번째 직장은 외국계 구매전문회사인 AMC이다.
그는 이곳에서 김오영 사장이란 인생의 선배를 만난다.
AMC에서 최단기간에 인사담당 임원으로 승진할 정도로 '잘 나가고' 있을 무렵 이제 막 한국에 진출한 푸르덴셜 생명보험으로부터 스카우트(인사부장) 제의를 받게 된다.
그가 AMC에 있는 동안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은 그 때가 세 번째였다.
평소 '직장상사와 부모님께는 무조건 정직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그였기에 이번에도 김 사장에게 찾아가 스카우트 문제를 상의했다.
김오영 사장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번에는 가십시오.금융업은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앞으로 인생을 넓힐 기회가 많을 겁니다"라며 그를 보내줬다.
김 사장은 떠나는 그에게 AMC에서 가장 우수한 직원 한명을 함께 데려가도록 배려했다.
푸르덴셜에서의 첫 3년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저축성 보험에 익숙한 한국사람들에게 푸르덴셜이 판매하는 종신보험은 입맛에 맞는 상품이 아니었다.
"보험설계사들은 팔 상품이 없다고 아우성이었죠.직원들은 회사를 떠났고 급기야 한국지사를 폐쇄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그를 비롯한 간부들은 일본에서 3박4일간 한국지사 폐쇄 여부를 결정하는 최종 마라톤 회의를 열었다.
결론은 '다시 한번 원점에서 시작해보자'는 것.그는 이때 중대한 결심을 한다.
사무직에서 영업직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한 것이다.
영업을 모르고선 보험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39세의 늦깎이 보험세일즈맨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보험지점장 생활은 고달팠다.
세일즈,직원교육,지점운영을 동시에 하느라 처음 석달간은 하루에 두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었다.
당시 가족들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의 눈에서 발산되는 광채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 느껴본적 있습니까? 일을 하다보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조금만 더 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일의 강도를 조금씩 조금씩 더 높이다보면 어느덧 몸은 거기에 적응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정신의 힘이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지점장으로 영업현장을 누비던 5년간 그는 '죽을 만큼' 일했다.
"당시 머리 속에는 두가지 생각만 있었습니다. 하나는 한국의 생명보험업(저축성보험)을 생명보험업 본연의 모습(보장성보험)으로 바꾸겠다. 다른 하나는 저를 믿고 따라 준 라이프 플래너들을 위해 일하다 죽겠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의 이같은 노력 덕분인지 푸르덴셜은 '지사 폐쇄'의 위기를 딛고 97년에는 삼성 교보 대한 등과 함께 최우수 생명보험사로 선정된다.
한국에서 그의 활약을 눈여겨 보던 푸르덴셜 본사는 황 사장을 국제적인 '해결사'로 중용한다.
한국 시장이 안정을 찾은 98년,그는 푸르덴셜 브라질로 파견근무(경영담당 임원)를 나간다.
당시 브라질 지사의 상황은 91년 당시의 한국과 비슷했다.
영업조직은 무너지고 있었고 상품은 시장에서 통하지 않았다.
그는 브라질에 가서도 '그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설계사를 찾아가 라이프 플래너가 가져야 할 자긍심과 소명감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까지 일하는 '보험에 미친' 임원의 모습을 보여줬다.
"얼굴색과 피부색은 달라도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의 본성은 같습니다. 보험 판매원이 가져야 할 소명의식에 대해 항상 강조했습니다."
1년간의 파견근무 생활을 마치고 브라질을 떠나는 날.그는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의 작별파티'를 경험한다.
브라질 직원들은 그를 식당에 초청한 후 떠나는 그를 위해 마지막 이별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고국으로 떠나는 그에게 브라질 직원들이 선물한 것은 그들끼리 힘들게 연습한 '애국가'였다.
이후 그는 한국에서 1년을 근무한 뒤 다시 한번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이탈리아의 영업조직을 부활시키라는 그룹의 특명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2001년 7월에 귀국한 후 영업담당 전무,부사장(2002년)을 거쳐 지난해 10월 한국지사 사장자리에 올랐다.
39세의 나이에 부인을 상대로 첫 보험영업을 한지 딱 10년만의 일이다.
최철규 기자 gray@hankyu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