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시장이 우리의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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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 논설위원 겸 경제교육연구소장 >
마르쿠제는 기업의 자유라는 단어 뒤에 '따위'라는 수식어를 붙여 말했다.
'지배의 새로운 형태'라는 책에서 그는 "기업의 자유 따위는 일할 수 있는 자유,굶어 죽을 수 있는 자유라는 말처럼 모순적인 것"이라고 썼다.
궁극적으로는 경영권을 해체하는 것이 진보라는 좌파 기업관은 그렇게 공식화됐다.
세계의 대학가를 휩쓸었던 60,70년대의 네오 마르크시즘은 바로 이런 반기업 캠페인으로 정체를 드러냈다.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 하버마스, 아도르노와 함께 독일의 젊은이들을 반(反)시장 전사들로 만들어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전후 독일의 부활을 끌어왔던 라인강의 기적 체제도 그것과 함께 끝장나고 말았다.
70년대 초반까지 연 6.1%의 고도성장을 달려왔던 독일이 80년대의 저성장,90년대 이후의 사실상 제로 성장기로 들어선 것은 네오 마르크시즘의 오도된 기업이념,경제이념,교육이념의 결과라는 측면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평준화 대학들은 실업자 공원으로 전락했고 마르쿠제의 명제를 따라 노사 공동경영의 덫에 걸려든 기업들은 해외로 나가거나 아니면 이사회 의장의 캐스팅 보트 '따위'를 둘러싼 지루한 논쟁들에 매달려 있다.
분업(기업)은 인간성의 소외일 뿐이라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제도화한 결과가 오늘날 비효율의 대명사처럼 돼 있는 독일 대기업의 지배구조다.
60년대 말 학생운동의 선두에 섰던 슈뢰더 총리가 지금 '아젠다 2010'을 들고 우파로 돈다지만 이미 뿌리깊은 좌파 중독을 떨쳐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소액주주 운동과 근로자 경영 참여를 동시다발적으로 제기하며 기업을 좌우에서 몰아치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는 과연 마르쿠제의 반(反)기업 명제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것인가.
사회운동가들과 투기자본들이 경영권을 공격하고 기업을 이중삼중의 사회적 감시망에 옭아 넣어놓은 상태에서 활기찬 경제를 논할 수는 없다.
그것은 반기업을 넘어선 어이없는 반경제 동맹일 뿐이다.
심지어 뉴라이트를 하겠다는 일부 지식그룹조차 '공동선'이라는 명분을 내걸면서 얄팍한 타협을 모색할 정도로 만연해 있는 전체주의적 사고는 과연 무엇으로 바로잡아 나갈 것인가.
기업의 존재이유를 사회공헌이라고 답하고 경쟁이 아니라 합의가 경제를 끌고간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우리 또한 마르쿠제의 학생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마르크시즘 파시즘과 기타 어떤 형태를 표방하건 독재적 정치질서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또 얼마나 고난의 시간들을 보내야 할 것인가.
성장할수록 분배가 나빠진다는 오도된 주장들이나 성장이 정체되면서 더욱 넘쳐나는 분배 평등론들이 원인과 결과 관계를 혼동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역시 건강하고 내실있는 경제를 담보하기 어렵다.
우리가 새삼 경제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한때 유행했듯이 아이들에게 재테크 기술 따위나 가르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자 아빠식의 속물적 망상을 부추기고 극단적으로 황금 지상주의의 독약을 퍼뜨리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반시장 정서를 대량 생산하고 있는 고등학교를,대학을,나아가 정치 슬로건들을 바로잡지 않고는 역설적이게도 가난과 불평등의 악순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우리의 시장경제 교육관이다.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평등이 아니라 경쟁이,섣부른 이타심이 아닌 합리적 이기심이 국부의 유일하고도 정당한 원천이라는 엄정한 시장경제론을 가르치자는 것이 한경 경제교육연구소의 설립 이념이다.
한경 경제교육연구소는 좋은 경제,건강한 나라로 가는 길은 오직 시장을 통해서만 열린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커리큘럼의 대강을 삼고자 한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