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선글라스들의 반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정규재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대통령의 책상 위엔 매일 아침 깨끗하게 정리된 한건의 서류가 올라갔다.
나랏 님이 봐주시기를 기다리는 이 서류는 소위 '존안 자료'의 하나다.
창가의 솔잎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아침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도 이 서류는 간 밤에 일어난 갖가지 추악하고 매쓰껍고 더러운 뉴스들을 가득 담고 있다.
"K 모 국회의원이 S 룸 살롱에서 호스티스를 과다하게 희롱했다함"
"L 모 회장이 K 모 장관에게 금액 미상의 뇌물을 건넴"
"K 모는 사생아를 낳았으며 M 모는 B 모 여인을 첩으로 두고 있다 함"
"A 모 의원은 대통령을 좌익 출신이라고 욕했고 동석한 L모 의원은 맞장구를 쳤다 함"
존안 자료는 이렇게 대통령의 하루를 열었고 지난 밤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언제나 대통령의 손바닥 위에 가장 먼저 올라왔다.
우리의 대통령들은 과연 세상을 움켜쥐었던 것일까.
어떻든 비서관이 호출되고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면 일단의 선그라스들은 어깨를 한번 쓰윽 추스리며 "자아슥들…"이라는 득의의 표정으로 청와대를 빠져나오곤 했다.
다시 쓰레기 냄새가 온 나라를 진동시키고 있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조차 이미 한쪽 당파에 가담하는 더러운 짓거리가 되고 만 상황이다.
테이프를 팔러 다니는 자들이 있고 이를 사들이는 언론사들이 있다.
음지의 인물들은 흥정을 붙이고 저널리즘은 그렇게 시궁창에 머리를 박았다.
우리 편에 유리하기만 하다면 불법이건 위법이건 가리지 않는 것은 오랜 정치 투쟁사에서 형성된 기본 행동 요령이다.
한국인들이 쓰는 국어 사전은 정치를 음모와 책략으로 정의한지도 오래다.
"분당과 족벌, 사화와 댕쟁 등 퇴행적 요소가 한국 민족의 유전자는 아닌가 회의를 품을 때가 있다"고 말한 사람은 식민지 시대 일본 사학자가 아니었다.
민족사에 대한 턱없는 미화를 경계했던 리영희 교수는 그렇게 쉽지 않은 사회 고발을 감행했다.
삼경이 지난 시간에 더러운 투서와 은밀한 고변으로 막을 올렸던 수도 없는 당쟁과 사화들을 떠올리며 민족 혈류의 청탁을 다시 논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는 것인지…."때는 이 때"라며 왁짜하게 들고 일어서는 정파들을 보면 영락 없는 사화의 재판(再版)이다.
엇그제는 또 한 명의 선그라스가 나타나 "테잎의 진짜 주인은 나다.
내가 입을 열면…"이라며 대갈 일성을 토하기도 했다.
정말 가관이다.
내가 개에 더 가깝다는 것을 경쟁하는 그런 시대다.
그래서 모욕감 혹은 당혹감 없이는 뉴스를 접할 수 없다.
작가 최인훈은 "광장이 없는 곳엔 밀실도 없다"고 말했다.
그의 주인공 이명준은 광장과 밀실이 공존하는 사회를 찾아 제3국으로 떠났지만 이 나라가 싫어 떠난다는 사람들의 여린 감수성에 머리가 끄덕여지는 요즘이다.
이렇게 이명준의 고민으로, 아니 최인훈의 고민으로 우리는 다시 끌려 들어가고 있다.
밀실 풍경을 광장의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은 미분화 사회,후진적 사회의 새로운 증거일 뿐이다.
보호할 가치가 없는 음험한 밀실의 대화들이 너무도 많았던 탓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불법 증거를 유죄의 증거로 할 수 없는 형사 소송법의 냉정한 법치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코 근대 사회일 수 없다.
테이프 사건에 뛰어든 모 언론사의 한 기자는 "(이번 보도로) 자본의 심장에 비수를 꽂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참 장한 일이다.
그러나 그 비수는 음지의 선그라스들이 분노에 사로잡힌 그의 손에 쥐어준 것일 뿐이다.
그렇게 음모는 성립되었다.
스파이들의 반란의 끝은 어디인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