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桂燮 < 서울대 교수·경영학 >

핵실험 이후 신문 지상에 자주 게재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모습들. 특히 조·중 국경 인근에 살고 있는 빈곤에 찌든 동포들의 모습은 이 땅에 일어난 '자주(自主)의 역설'을 곱씹게 한다. '자력갱생'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던 나라는 자주를 잃고,통념적으로는 자주와 거리가 먼 듯한 정책을 추구하던 나라는 세계에 우뚝 서게 된 역설.

종속 경제라는 비판을 받던 우리 경제는 민족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세계적인 위상(位相)을 누리고 있다. 종속이론,세계체제론 등을 신봉하던 이들은 우리가 미국 일본과 같은 '중심부 국가'들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돼 착취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빈곤의 저주로부터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제는 중심부 국가의 전유물(專有物)이라고 여겨졌던 해외직접투자에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최근까지 중국의 최대 대외 직접 투자국이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등 많은 회사가 미국 본토에 공장을 짓고 수많은 미국인들을 고용하고 있다. 우리의 수출상품은 자동차,반도체,조선 등 고부가가치 상품들이다.

한편 자립 경제를 추구한다고 해서 일부 지식인들이 동경(憧憬)했던 북한은 중국 경제에 철저하게 종속됐다. 폐쇄 정책의 무게에 경제기반이 사실상 붕괴됐기 때문이었다.

금융경제연구원은 2004년 말 현재,중국 상품이 북한 시장에서 거래되는 생필품(生必品)의 80%가량을 차지한다고 지적했다. 그뿐인가. 올해 '평양 국제상품 전람회'에 참가한 업체들 가운데 80% 이상은 중국 기업이거나 중국과의 합영(合營)기업이었다. 동아시아 최대의 철광 광산으로 알려진 무산광산은 중국 자본의 영향 아래 있고,중국의 지린성(省) 정부는 부두를 확장해주는 대신 50년간 나진항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자주의 역설이 일어났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자주는 구호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주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 민족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일종의 '희소재(稀少財)'다. 그리고 모든 희소재가 그렇듯 피나는 노력으로 쟁취해야 한다.

둘째,자주를 달성하는 데는 '왕도(王道)'가 없다. 많은 이들이 '종속'을 부른다고 여기는 정책이 자주로 가는 지름길을 제공할 수 있다. 동시에 자립 경제를 이룩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정책들이 실제로는 자주를 앗아갈 수 있다.

과거 우리는 이 같은 '자주의 역설'의 작동 원리를 꿰뚫어 본 리더십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주는 도식적으로 접근해서는 얻어질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독창적인 경제 정책을 개발하고 실험했다. 구호만으로 외치는 자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공허한 당위론을 늘어놓기 보다는 실력을 쌓으려고 했다. 그랬기에 세계 최빈국(最貧國) 중 하나였던 나라가 세계 경제 10위권을 넘보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또 한번의 역설이,이번에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려고 한다. 입만 열면 '민족의 자존심'을 강조하는 정부와 여당은 구호가 실력을 대신해줄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정권을 잡은 뒤 이전 세대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높아진 우리 경제의 위상을 자랑하기에 바빴지 위상을 지키고 신장시키는 일에는 부족했다.

그 결과 자주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다. 세계 경제에서 우리 경제의 지위는 한 단계씩 미끄러져 내리고 있다. 성장은 답보 상태다. 기업들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잃어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북한이 과거에 범했던 과오(過誤)를 우리가 답습할 듯하다.

말뿐인 자주를 고집하다가 굴종의 수렁 속으로 빠질 것인가,아니면 자기 만족을 모르는 끊임없는 정진으로 세계 일류 경제 대국으로 도약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