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소통단절의 악플문화 스스로 고쳐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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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브래드 피트 주연의 '바벨'과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인 '대화가 필요해'를 보면 묘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현대사회의 숙제와도 같은 소통의 문제다. 영화 '바벨'에는 무려 6가지 언어가 나온다.
영어 스페인어 일어 아랍어 베르베르어 그리고 수화까지. 그러나 감독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메시지는 소통의 부재와 관계의 단절이다.
'개콘'의 '대화가 필요해' 역시 타이틀 그대로 대화가 부재한 가족이 빚어내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개콘을 보며 우리는 폭소를 터뜨리지만 사실 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현대인들은 전화, 휴대폰, 이메일, 메신저 등 과거 어느 시대보다 다양하고 발전된 소통수단을 갖고 있으면서도 수시로 소통의 장벽에 부딪힌다.
그 벽을 겁내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보지만 벽은 더욱 크고 단단하게 느껴진다.
마치 바벨탑이 무너진 뒤 갑자기 소통이 불가능해진 인간 군상들과 같다.
이제 인터넷은 사회, 국가는 물론 세계를 '생각의 속도'로 묶어가고 있다.
백과사전도,국어사전도 종이로는 만들 필요가 없어졌을 만큼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고, 뉴스의 원천이며, 공유의 장(場)이다.
이메일 메신저와 함께 댓글의 존재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든 의사표현과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쌍방향 의사소통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세상 일은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과거 화장실 낙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저질·외설·가학·폭력적인 댓글, 즉 악플들이 인터넷 시대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현 부장은 이 칼럼에서 악플 문제를 학창시절 학교 담벼락 또는 화장실 낙서에 빗대 흥미롭게 풀어간다. 악플의 심각한 폐해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들이 자살하고,그 연예인 관련 기사에 다시 악플을 다는 행위는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란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2년 전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이 인터넷 실명제를 거론했을 때 벌떼처럼 일어났던 네티즌들의 반대 여론도 이번엔 비교적 조용하다.
하지만 7월부터 시행할 제한적인 인터넷 실명제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차·가명 악플러의 추적에 한계가 있고,악플의 범주를 어디까지 규정할지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실명제를 실시해야 할 당위는 충분하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건강한 소통'을 위해서다.
칼럼에서 지적했 듯이 교통사고가 많다고 정보의 고속도로를 폐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댓글문화의 장점은 두루 살려야 한다.
하지만 '주먹 휘두를 권리는 상대방 코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다.
인터넷의 익명성에 기대 악플을 다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의 악플을 못견뎌한다는 분석도 있다.
궁극적으로 악플을 달아 얻는 것은 순간의 왜곡된 쾌락이겠지만, 잃는 것은 정상적인 소통과 관계의 단절일 것이다.
윌리엄 미첼이 쓴 '비트의 도시'의 뒤 표지를 보면 재미있는 그림이 있다.
개가 컴퓨터 앞에 앉아 앞발로 키보드를 누르며 생각한다.
"인터넷에선 아무도 내가 개인줄 몰라!"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바로 현대사회의 숙제와도 같은 소통의 문제다. 영화 '바벨'에는 무려 6가지 언어가 나온다.
영어 스페인어 일어 아랍어 베르베르어 그리고 수화까지. 그러나 감독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메시지는 소통의 부재와 관계의 단절이다.
'개콘'의 '대화가 필요해' 역시 타이틀 그대로 대화가 부재한 가족이 빚어내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개콘을 보며 우리는 폭소를 터뜨리지만 사실 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현대인들은 전화, 휴대폰, 이메일, 메신저 등 과거 어느 시대보다 다양하고 발전된 소통수단을 갖고 있으면서도 수시로 소통의 장벽에 부딪힌다.
그 벽을 겁내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보지만 벽은 더욱 크고 단단하게 느껴진다.
마치 바벨탑이 무너진 뒤 갑자기 소통이 불가능해진 인간 군상들과 같다.
이제 인터넷은 사회, 국가는 물론 세계를 '생각의 속도'로 묶어가고 있다.
백과사전도,국어사전도 종이로는 만들 필요가 없어졌을 만큼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고, 뉴스의 원천이며, 공유의 장(場)이다.
이메일 메신저와 함께 댓글의 존재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든 의사표현과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쌍방향 의사소통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세상 일은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과거 화장실 낙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저질·외설·가학·폭력적인 댓글, 즉 악플들이 인터넷 시대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현 부장은 이 칼럼에서 악플 문제를 학창시절 학교 담벼락 또는 화장실 낙서에 빗대 흥미롭게 풀어간다. 악플의 심각한 폐해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악플에 시달리던 연예인들이 자살하고,그 연예인 관련 기사에 다시 악플을 다는 행위는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란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2년 전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이 인터넷 실명제를 거론했을 때 벌떼처럼 일어났던 네티즌들의 반대 여론도 이번엔 비교적 조용하다.
하지만 7월부터 시행할 제한적인 인터넷 실명제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차·가명 악플러의 추적에 한계가 있고,악플의 범주를 어디까지 규정할지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실명제를 실시해야 할 당위는 충분하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건강한 소통'을 위해서다.
칼럼에서 지적했 듯이 교통사고가 많다고 정보의 고속도로를 폐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댓글문화의 장점은 두루 살려야 한다.
하지만 '주먹 휘두를 권리는 상대방 코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다.
인터넷의 익명성에 기대 악플을 다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의 악플을 못견뎌한다는 분석도 있다.
궁극적으로 악플을 달아 얻는 것은 순간의 왜곡된 쾌락이겠지만, 잃는 것은 정상적인 소통과 관계의 단절일 것이다.
윌리엄 미첼이 쓴 '비트의 도시'의 뒤 표지를 보면 재미있는 그림이 있다.
개가 컴퓨터 앞에 앉아 앞발로 키보드를 누르며 생각한다.
"인터넷에선 아무도 내가 개인줄 몰라!"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