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 문규영 아주그룹 회장 "나는 릴레이 2번주자"
상냥한 미소와 낭랑한 목소리는 문규영 아주그룹 회장(56)이 지닌 매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3조5000억원(2006년 말 자산 기준) 규모의 그룹을 이끄는 '오너 경영인'이지만,그는 스스로를 낮추는 데 익숙해 있었다.

'2세 경영인은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을 테니 거만하지 않겠어'라는 일반인들의 편견은 "언제까지나 겸손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문 회장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꾸준히 배워서 쌓은 경영학 이론과 20여년에 걸친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그에게는 '오너 2세'보다는 '준비된 CEO(최고경영자)'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렸다.

문 회장은 '공부하는 CEO'답게 어떤 주제에도 막힘이 없었다.

이따금 터져 나오는 수준급 유머에서는 학창 시절 '성실하게 놀았다'는 장난꾸러기의 모습도 배어 나왔다.

교만해지는 게 두려워 지금껏 언론 인터뷰를 꺼렸다는 문 회장이 4시간에 걸쳐 풀어낸 인생 스토리는 그동안 베일에 숨겨졌던 시간만큼이나 더 밝은 빛을 발했다.


# 스트레스를 잘 풀어야 기업도 잘 풀려

―인상도 좋으시고 목소리도 너무 좋으세요.

방송국 앵커해도 어울리겠어요.

"과찬이십니다.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한 덕분이에요.

그룹을 이끌다 보니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임직원들 앞에선 웃는 모습을 보여야 하거든요.

제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임직원들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아마 연예인들도 저와 비슷할 겁니다."

―약주는 많이 하세요.

"그럼요.

스트레스도 술로 풀어요.

저는 CEO가 스트레스를 잘 풀어야 기업도 '술술' 잘 풀린다고 생각해요.

실제 1990년께 오너 2세 모임을 만들었는데,가만히 보니까 오너가 스트레스를 잘 해소하느냐,못 하느냐에 따라 10여년 후 성패가 갈리더군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서 좋은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일부는 큰 병에 걸려 중도 하차하기도 하고…."


# '콘크리트 부잣집'의 맏이로 태어나다

―창업주인 아버님(문태식 명예회장)은 어떻게 사업을 시작했나요.

"1960년에 시작했어요.

일단 일본에서 시멘트를 수입하는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시멘트 일을 하다 보니 전신주가 눈에 띄었던 모양이에요.

당시엔 50년 이상 묵은 큰 나무를 전신주로 썼는데,다 수입했거든요.

워낙 비싸니까 이걸 콘크리트로 대체하는 방안을 생각한 거죠.마침 그때 정부가 농어촌 전기보급 사업을 벌여 수요가 폭발하고,경쟁자는 없었으니….큰 돈을 벌었죠."

―부잣집 맏이였으니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컸겠습니다.

"전 중·고등학교 시절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놀 시간도 부족한데….아마 그때 공부를 안해서 지금 '공부 욕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때는 주말마다 등산가고,여행도 많이 다녔지요.

고1 때는 제주도를 무전여행으로 다녀오기도 했어요."

―아버님이 뭐라고 안 하셨어요.

"전혀요.

부모님은 한번도 공부하라고 다그치지 않았어요.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기보다는 밖에 나가서 좋은 친구 많이 사귀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는지….대신 아버님은 성실함을 강조했어요.

저야 '성실하게' 놀았죠.(웃음)"

―학창시절 그림도 그리셨다던데요.

"아주 좋아했고,지금도 좋아해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무슨 주제로 얘기를 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그림은 학창시절에 취미 삼아 그렸고,사회 생활하면서는 못했어요.

요즘 GE코리아의 강석진 전 회장 등이 참여하는 기업인 미술 클럽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어요."


# 군대시절…두려움을 극복하다

―군 생활은 하셨죠.

"그야말로 '빡쎄게' 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수도경비사단에서 꼬박 35개월을 복무했어요.

1968년 '김신조 사건' 때문에 창설된 서울 경비 부대인데,국가 대표급 권투선수와 씨름선수들이 가는 곳이었어요.

저는 서울에서 근무한다는 생각에 '유도 유단자'라고 우기면서 지원했던 거죠.실상을 알고 후회했지만,이미 때는 늦었죠."

―당시 수경사는 특전사보다도 군기가 셌다던데.

"부대원끼리 권투시합을 하는 훈련이 있었어요.

라운드 없이 어느 한 쪽이 쓰러질 때까지 하는 룰이었죠.제가 운동선수들이랑 상대가 됩니까.

만날 KO됐죠.어떻게 보면 곱게 자랐던 제가 처음 느꼈던 진한 고통이었어요.

하지만 세상에 얻어맞는 것보다 무서운 게 있습니까.

신참 때 매도 많이 맞고 숱한 고생도 하고 나니까 두려운 게 없어지더군요.

경영을 하면서도 그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죠."

―아들은 편한 부대로 보내고 싶으셨겠어요.

"아들놈 하나 있는데 얼마 전 해병대를 제대했어요.

제가 '아빠는 힘든 부대 가서 고생 많이 했지만 보람도 많았다'고 넌지시 말했더니,대뜸 해병대에 가겠다는 거예요.

이유를 물었더니,사람들이 자기를 '부잣집 외아들이니 언제 한번 고생해 봤겠어'라는 식으로 대한다는 겁니다.

이런 선입견을 없애고 앞으로 사회에서 당당해지려면 힘든 부대에서 고생 좀 해봐야 한다는 거였죠.듣고 보니 맞는 말이더군요."


# ㈜대우를 거쳐 가업을 물려받다

―㈜대우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는데.

"저나 아버님이나 남의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오너 아들로 일하면 평생 '졸병 생활'을 못해 보잖아요.

말단 사원을 해봐야 기업이란 걸 알 수 있고,직장인의 애환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지요.

㈜대우에선 3년간 종합상사 업무 전반을 익힌 뒤 런던지사로 나갔어요."

―㈜대우에서 어떤 걸 배웠나요.

"5년6개월 정도 있으면서 '부지런함'을 배웠습니다.

새벽부터 밤 9시까지 아무도 퇴근을 안하는 분위기였죠.제겐 '성실함'이란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는 기회였어요.

대우맨들이 아직까지 '잘 나가는' 이유는 초년병 때부터 이런 습관을 익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주로 언제 옮겼습니까.

"1983년 서른셋의 나이에 이사 직함으로 왔어요.

입사하고 곧 회식자리가 있었는데 한 직원이 맥주컵을 제 앞에 '턱' 놓더라고요.

그러더니 맥주가 아니라 소주를 따르는 거예요.

영업 담당 상무가 한 잔을 들이켜더니 저한테 권하더군요.

'아,술로 군기를 잡으려는구나.

꺾이면 안 된다'란 생각이 들었죠.마다하지 않고 비웠어요.

참석자의 3분의 2쯤이 쓰러지니까 술자리가 끝나더군요.

그 후로 직원들과 을지로 골뱅이집에서 술 많이 먹었습니다."

―최고경영자(CEO)는 언제 됐나요.

"아주로 온 지 3년 만인 1986년에 대표이사가 됐죠.제가 옮길 때만 해도 회사는 탄탄하긴 했지만,전신주와 건설용 건자재 생산이 전부였어요.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야만 했죠.첫 작품이 레미콘 사업이었어요.

당시엔 공사장 앞에 믹서기를 놓고 인부들이 모레와 시멘트를 직접 섞어서 만들던 때여서 값비싼 레미콘은 외면받았죠.하지만 인건비가 빠르게 오르면서 레미콘 장사가 되기 시작하더군요."

―새로운 사업도 많이 하고 싶었을 텐데요.

"검토하지 않은 업종이 없을 정도예요.

한 500개는 될 겁니다.

상봉터미널 건설,마포 서교호텔 인수 등도 그때 다 이뤄졌죠.하지만 당시만 해도 규제가 워낙 심한 데다 금융이 발달하지 않아 인수·합병(M&A)이 거의 불가능했던 탓에 정말 원하던 사업은 할 수가 없었어요."

―아주가 자산 3조5000억원 규모의 중견그룹이 될 수 있었던 계기는 언제 마련됐나요.

"외환위기 때죠.규제 탓에 신사업에 진출하지 못하고 돈을 쌓아놓은 상태에서 맞이했거든요.

많은 기업을 힘들게 한 그때가 우리에겐 기회가 됐어요.

우선 산업장비 렌털 사업에 진출했고,뒤이어 렌터카 사업(에이비스렌터카)에 뛰어들었어요.

렌터카를 통해 자동차산업을 알게 된 뒤 자동차 할부금융업체인 대우캐피탈을 인수했죠."

―아주는 창업 후 47년 동안 배당을 한 차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 아버님에 이어 제가 거의 유일한 주주니까 배당을 안 했죠.회사의 수익을 배당을 통해 제가 가져가기보다는 회사의 성장을 위해 유보금으로 쌓는 게 옳다고 판단한 거죠.지난 47년간 이익을 쌓아두다보니 탄탄한 자금력을 갖추게 됐죠."

―공격적인 경영스타일인 것 같아요.

"저는 도전을 즐기는 스타일이에요.

실패하더라도 어떤 때는 행복하기도 해요.

'이번엔 안 됐지만 다음엔 준비가 돼 있으니까 걱정없어' 이런 식이죠.저는 골프를 칠 때도 공격적으로 해요.

스코어 관리하는 골프는 재미가 없어서…."

―경영하면서 언제가 제일 어려웠나요.

"노사분규가 한창이던 1987년부터 4년 동안 정말 힘들었어요.

감당하기 힘든 요구를 내걸더니 본사를 점령하고,저를 사장실에 감금하더군요.

그러더니 몇 사람이 시너통을 메고 들어와서 '안 들어주면 죽겠다'면서 담배를 피우는 거예요.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안정되니까 노사분규도 자연스레 없어졌어요.

그때부터 '임직원들에도 회사 경영상황을 투명하게 알려주자'고 마음먹었죠.차츰 터무니없는 요구와 불필요한 의심이 사라지더군요."


#"나는 릴레이 2번 주자"

―오너 2세인 게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까.

"혜택인데 그걸 부담이라고 하면 안되죠.하지만 엄청난 책임감은 느낍니다.

저는 스스로를 '릴레이 2번 주자'라고 생각해요.

아버님이 일으킨 사업을 더 잘 키워서 다음 주자에게 넘겨줘야 한다는….내가 0.1초라도 단축하는 게 다음 주자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마음으로 일합니다.

오너 2세의 장점이라면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작은 일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2세를 좋은 방향으로 키우면 큰 그릇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오너와 CEO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오너와 CEO는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봐요.

CEO는 현재 관점에서 실적을 올리는 데 주안점을 두지만,오너는 장기적인 성장 관점에서 기업을 보거든요.

일각에선 삼성 현대자동차 LG 같은 대기업은 오너가 없어도 잘 굴러갈 거라 생각하지만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너가 중심을 잡아줘야 기업이 제대로 움직입니다.

저 역시 전문경영인에게 일반 경영은 맡기되 미래에 대한 방향은 짚어줍니다."

―오너는 책임을 미룰 수 없다는 점에서 외로울 것 같은데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제 판단은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너무 많아요.

제가 10년 전부터 공부에 '올인'하는 이유예요.

'지금 내가 아는 만큼 과거에 알았더라면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 때문이죠.앞으로도 판단해야 할 일이 숱한데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공부하는 겁니다."

―난제에 부딪쳤을 때 조언을 받는 사람이 있나요.

"전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으면 잠에서 깨는 새벽 무렵에 힌트가 나와요.

참 희한해요.

깨는 동시에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답이 나오니….아마 자면서도 고민을 했기 때문이겠죠.물론 임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해법을 많이 찾습니다."


#경영비법은 교과서에 있다

―독서량은 어느 정도죠.

"아무리 바빠도 매일 한두 시간을 책 읽는 데 할애하려고 노력해요.

요즘엔 JP모건과 모건스탠리를 다룬 '하우스 오브 모건'을 읽고 있어요."

―이론과 현실은 다르지 않나요.

"저는 '경영은 순진하게 해야 한다'고 믿어요.

책에 나온 대로 하면 됩니다.

예컨대 '인재가 떠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라' 이런 거죠.누구나 아는 거지만 실제 이렇게 하는 기업은 많지 않아요.

'나만의 경영비법'으로 성공한다는 건 단기간엔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론 어렵습니다."


#아이디어 내는 직원이 가장 예뻐

―어떤 직원이 제일 마음에 드세요.

"아이디어를 잘 내는 친구요.

의향을 물어봐서 일하는 사람보다는 이렇게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사람이 좋죠.다행히 아주그룹에는 '아이디어 뱅크'들이 많아요.

전체 직원이 2000명 정도인데 한 달에 제안이 2500건씩 접수됩니다."

―인재는 어떻게 키웁니까.

"시스템입니다.

범재를 인재로 만드는 게 중요한 겁니다.

저는 회사에서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절반의 책임은 회사에 있으니 배상책임 같은 건 묻지도 마라'고 해요.

직원이 유혹을 느낄 정도로 시스템이 느슨했다면 회사 책임도 큰 거 아닙니까.

좋은 회사는 임직원들이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시스템이 잘 돼 있어요.

인재를 만드느냐,범죄자를 만드느냐는 어찌보면 회사에 달려 있습니다."

정리=오상헌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