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자고 일어나면 동네마다 음식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2007년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서비스업 실태 조사’만 봐도 전국적으로 등록된 음식점 수가 무려 53만1929개에 달한다. 새롭게 들어서는 음식점이 많은 만큼 망하는 곳도 많다. 특히 수도권 신도시인 일산은 음식점들이 밀집돼 있고 품목이 교체되는 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하다.

이 가운데 ‘라페스타’는 일산동구의 대표적인 유흥가로, 입점 업체 300여 곳 가운데 35%가 음식점일 정도다. 이 라페스타 옆에 자리 잡은 고깃집 ‘백목장’은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만 4년째 건재하고 있는 일산의 터줏대감이다.

고기 맛 좋기로 소문난 백목장의 주인은 놀랍게도 중견 탤런트인 백준기 씨(55)다. 1976년 탤런트로 데뷔한 백준기 씨는 ‘한명회’,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 등에 출연했고, 근래에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가끔씩 만날 수 있는 낯익은 탤런트다.


희비가 교차한 사업 이력

“우리 나잇대 남자들은 누구나 공감할 거예요. 사회에서는 점점 밀려나는데,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남아 있거든요. 저도 먹고 살기 위해 내 목숨이다 생각하고 식당을 시작했지요. 요즘 젊은 연예인 후배들은 똑똑해서인지 방송에서 한창 잘 나갈 때 사업도 함께 시작하지만, 우리 때는 그런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2001년 그가 처음 손댄 사업은 인천 한 찜질방 구석의 작은 식당이었다. 식당을 시작한 계기는 기막힌 우연이었다. 가족들과 단골로 다니던 찜질방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음식을 조금만 잘해도 손님을 독점할 수 있는 곳에서 참 맛없게도 만들어 판다’고 한마디 했다. 그 소리를 들은 뒷자리의 다른 손님이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찜질방에 식당을 차려보라’고 제안하고 나섰다. 사흘 만에 계약하고 2개월 준비한 끝에 시작한 식당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손님들을 줄 세워가며 장사를 했지요. 24시간 체제라 형과 동생을 다 불러서 온 가족이 매달렸어요. 미역국이나 음료수를 파는 수준이이서 재료비가 많이 들지 않는 대신, 파는 족족 현금으로 수입이 들어오는 장사여서 괜찮았지요. 2년 만에 5억 원 가까운 이익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찾아온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롭게 바뀐 찜질방 주인이 사업성을 알아보고, 엄청난 계약금과 월세를 요구한 탓이었다. 손에 쥔 얼마의 돈으로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마침 옛날 매니저로 인연을 맺었던 지인이 고기 도매업을 하고 있어서 고깃집을 선택했고, 10년 넘게 산 일산에 가게 터를 구해 2003년 9월 ‘백목장’의 문을 열었다.

“내가 맛있으면 손님도 맛있는 게 당연하겠지요. 질 좋은 고기를 주로 놓고 반찬 몇 가지만 소박하게 곁들여 맛있는 된장찌개를 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가격은 주변과 비교해서 크게 싸지 않은 편이지만, 맛과 품질을 내기 위해 들이는 재료비에 비해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입니다.”

백목장은 고기 본연의 맛으로 승부하려는 집답게 쇠고기 갈빗살, 안창살, 꽃살의 단출한 메뉴로 시작했다. 하지만 가게가 이제 막 자리 잡으려는 3개월 차에 광우병 파동이 났다. 쇠고기 단일 품목으로는 광우병처럼 뜻하지 않은 된서리를 피하기 힘들겠다는 판단에서 추가된 메뉴가 백목장의 유일한 돼지고기 메뉴인 생오겹살이다.

“아무리 좋은 고기를 들여와도 손님이 자주 찾지 않아서 제때 회전이 되지 않으면 질이 떨어집니다. 다양한 부위를 취급하기보다 종류가 적어도 신선한 고기를 맛볼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당장 한두 명의 손님이 찾는다고 해서 무조건 욕심을 부려 확장하면 결국 망하는 법입니다.”

백목장은 4년 동안 큰 굴곡 없이 안정적인 매출을 기록하며 지속돼 왔다. 그러나 백준기 씨 개인적으로는 1억2000만 원을 사기 당하는 아픈 경험을 하기도 했다. 온 가족이 뼈 빠지게 모은 큰돈을 날린 것은 나중이고, 8년이나 알던 후배에게 믿음을 배반당했기에 더 쓰라렸다고 한다. 아무리 친하다 한들 제 잇속 따지지 않고 순전히 상대방 이익만을 위해서 투자를 권유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배운 수업료였던 셈이다.


수술까지 할 정도로 몸 움직여

4년 동안 별 일 없이 장사를 할 정도면 가게 목이 꽤나 좋은 자리로 짐작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주변 거리에 유동인구가 많다고 해도 백목장과 이웃하고 있는 점포는 해마다 주인이 바뀌고 있다. 백목장의 건재를 위해 그동안 그가 쏟은 노력은 대단하다. 오전 열한 시에 문을 열고 새벽 다섯 시에 닫을 때까지 열다섯 시간 이상을 매일같이 일했다. 드라마 촬영을 끝내고 다시 아침에 나가야 하는 날에도 가게에는 꼭 들렀다.

“백목장을 열며 배수에 진을 친 것이라고 마음먹었으니까요. 여기서 무너지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살이 7kg 정도 빠지고 탈장 수술을 할 정도까지 일했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손님이 있어야 할 시간대에 테이블이 비어 있으면 피가 바짝바짝 마르고 초조해집니다.”

그는 멀리서 손님 테이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 봐도 고기 익은 정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동안 허투루 장사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들어오는 손님마다 일일이 인사하고 챙기는 그의 모습은 완벽한 고깃집 주인이다. 추우나 더우나 문가 자리를 도맡아 서빙하는 그의 철칙은 절대 손님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한 연예인 동료들이 와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그래도 새벽 한 시 정도면 집에 들어가요. 주방장은 창업 때부터 함께 일했던 친구고, 우리 부부를 포함해 아홉 명 식구가 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마감을 꼭 제가 하지 않아도 다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이지요. 사장이 눈 부라리고 감시해도 나쁜 마음 가지면 순식간이에요. 믿음을 가지고 편하게 가야 합니다.”

그동안 별의별 일이 많았지만 종업원들이 잘 따라주고, 손님들이 잊지 않고 찾아 준 덕에 일을 할 수 있어 고맙기만 하다. 특히 백목장 손님들의 80%는 단골이다. 이제 손님들에게 그는 탤런트가 아니라 단골 가게 형님 내지는 아저씨가 되었다. 그는 단골과 그냥 손님의 차이는 백목장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제 얼굴로만 장사를 하려고 했으면 얼마나 갔겠습니까. 우리 고기를 사랑해 주시는 손님들 덕택에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제 인생에서 잘못된 것은 다 제가 부족한 탓이었지만, 잘 된 것은 주어진 기회와 사랑을 남김없이 활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가 현재 인생을 살면서 유일하게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연기자로서 설 자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죄다 젊은 연기자의 몫이고, 그나마 중견 남자 배우가 필요한 사극에서는 배역을 제대로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작은 배역이어도 나를 위한 작품이라는 애정을 가지고 연기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보며 자신의 그릇을 제대로 파악하자고 다짐한다는 백준기 씨. 만 30년 연기 경력의 연기자이자 50대 중반을 넘긴 중년의 가장으로서 자신을 버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진솔하게 다가왔다. 문의 (031)932-3999

김희연 객원기자 foolf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