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의료인으로 살아오면서 사회적 편견이나 통념에 부딪혀 억울한 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럴 때마다 직설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부족함을 메우려 노력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누가 제게 부탁한 것을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을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다음 달부터 한강성심병원 강동성심병원 강남성심병원 등 6개 산하 병원(총 3200병상ㆍ8000여명의 직원)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은 이혜란 신임 한림대의료원장(55)은 28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여성으로서 이례적으로 매머드 대학병원의 수장이 된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여의사 비중이 월등이 높은 이화여대의료원을 제외하고 종합대학병원에서 여성이 의료원장에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의료원장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 소아알레르기 및 호흡기질환 분야에서 연구 및 계몽 활동에 적극 나선 덕분에 의학계는 물론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해 신규 의사면허 취득자의 33.5%가 여성인 상황에서 이번 여성 의료원장의 탄생은 앞으로 다가올 의료계의 여풍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의료원장은 "'몸에 사향을 지녔으니 굳이 바람과 맞서야만 하랴'라는 격언을 늘 가슴에 두고 살았다"며 "포용하는 지혜와 긍정의 힘이 묻어나는 향기를 풍겨야 한다"고 후배 여성 의사들에게 조언했다. 그는 "병원 일과 가사를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아는 게 저의 장점"이라며 "집에서 엄마,아내,며느리로서 역할을 잘했다고 할 수 없지만 항상 최선을 다해왔고 시어머니와 남편이 너그럽게 이해해줬기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이 의료원장 등용은 보수적인 풍토의 의료계에서 파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의료원 관계자는 최근 10년간 이 원장이 보여준 역량을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강동성심병원 기획실장 및 원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실무경험을 쌓아왔고 지난해에는 오랜 숙원이던 두경부암센터 신축 문제를 해결했으며 최근에는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스웨덴 웁살라대학과의 교류를 성사시켰다. 이런 성과는 친화력과 함께 과감성을 겸비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이다.

이 의료원장은 "한림대의료원이 잠재 역량에 비해 브랜드 인지도가 낮다"며 "재임 기간 중 브랜드 파워를 높이는 데 주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내년 하반기에 화성 동탄에 600병상 규모의 병원을 착공하고 강남성심병원은 로봇수술,강동성심병원은 두경부암의 메카로 육성하며 의대 본과 4학년생(내년엔 74명 중 19명)에게도 항공료와 체재비를 지원해 외국 의대와의 교환 연수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또 이라크와 베트남에 병원 경영 기법을 전수하고 100만달러를 기부해 미국 컬럼비아대와 함께 아프리카 빈민에 대한 의료 지원에 나서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