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냉전(冷戰)이 종식된 지 17년이 흐른 지금 지구촌에 '신 냉전의 전주곡'이 퍼지고 있다. 냉전이란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자본주의와 공산 진영 간 첨예한 대립의 역사를 뜻한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열전(熱戰)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미국 재정전문가인 버나드 바루크가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둘러싼 의회토론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며 널리 알려졌다. 신냉전의 진앙지는 유럽과 아시아의 건널목인 그루지야.'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냉전시대의 영광을 재연하려는 러시아와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고수하려는 미국 간 갈등이 그루지야에서 정면 충돌하는 양상이다.

◆세계 지정학 지도 변화

지난 8월8일 지구촌의 평화와 행복을 염원하는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 개막식 폭죽이 베이징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시간,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코카서스 지역에 있는 그루지야에선 전쟁의 포성이 울려퍼졌다. 옛 소련 해체과정에서 분리 독립한 뒤 친서방 노선을 걸으며 미국이 이끄는 나토(NATOㆍ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추진해 온 그루지야가 자국 영토에 있는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의 독립 시도를 차단하기 위해 군사 공격을 시작하자 러시아가 그루지야로 탱크와 전투기를 들여보냈다. 지난 6일 러시아 국가평의회에 참석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8월8일을 기점으로 세계는 변화했다. 러시아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나라"라고 선언했다.

유럽연합(EU) 순회의장인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중재로 러시아와 그루지야 모두 평화 협정에 서명하고 러시아가 철군을 시작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보였던 그루지야 사태는 러시아가 그루지야 내 친 러시아 성향 자치공화국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다시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국과 러시아 군함이 잇달아 그루지야와 압하지야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전운마저 감도는 상황이다.

그루지야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세계가 친(親)러와 반(反)러로 갈리는 등 지정학 지도에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벨로루시 등이 러시아 편에 섰다. 반면 미국과 영국 폴란드 등 NATO 회원국과 옛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은 반러 대열의 선봉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은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사태를 관망하는 자세다.

◆거대한 '돈의 전쟁'

러시아의 그루지야 공세는 중앙 아시아 지역의 자원ㆍ에너지 통제권을 노린 것이란 점에서 거대한 '돈의 전쟁',소위 '냉전(冷錢)'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러시아가 동서 에너지 통로인 그루지야를 무력화시켜 유럽의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더욱 높이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루지야는 주요 산유국은 아니지만 카스피해와 지중해를 잇는 BTC 송유관이 지나가고,흑해로 향하는 가스 수송을 위한 철도가 놓여 있는 요충지다. 특히 바쿠(아제르바이잔)~트빌리시(그루지야)~세이한(터키)을 연결하는 BTC 송유관은 총 길이 1768㎞로 2006년 5월 개통 이래 하루 100만배럴의 카스피해산 원유를 유럽으로 실어나르고 있다. 또 바쿠에서 그루지야를 거쳐 터키의 에르주룸까지 이어지는 692㎞의 BTE 가스관도 연 66억㎥의 천연가스를 공급하고 있다. 이 송유ㆍ가스관은 유럽지역의 주요 에너지 공급원인 동시에 아제르바이잔과 그루지야가 러시아의 우산에서 벗어나는 발판이 됐다.

전문가들은 "냉전(冷戰)보다는 냉전(冷錢)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과거 냉전시대와 달리 지금은 서구와 러시아 간 긴밀한 경제적 협력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 간 교역액은 지난해 267억달러(약 29조원)에 달했다. 올 상반기에도 미국은 46억6000만달러어치를 러시아에 수출했고 러시아는 미국에 1750만배럴(약 20억달러)의 석유 등 총 133억달러어치를 실어보냈다.

EU와 러시아도 얽혀있긴 마찬가지다. EU와 러시아 간 지난해 교역액은 2800억달러(약 302조원)에 이른다. 신 냉전이 송유ㆍ가스관 등 에너지 공급 통로를 막거나 동서 간 무역을 급랭시킬 경우 가뜩이나 어려운 글로벌 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하지만 양측의 경제적 협력관계가 오히려 전쟁 억지력으로 작용해 냉전을 비껴갈 것이란 낙관적 시각도 있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신 냉전 조짐은 단순히 평화주의자의 애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뉴욕과 모스크바 최고경영자(CEO)들의 밤잠도 설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기업 경영진들이 신 냉전 사태를 막기 위해 로비를 벌일 것"이라며 "이러한 노력이 동서 간 군사적인 충돌이나 본격적인 냉전 사태로까지 번지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