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은행(CBㆍCommercial Bank)이 투자은행(IBㆍInvestment Bank)을 갖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7년 전부터 생각했다. "

미국 월가의 금융위기 격랑 속에서 지난 15일 세계 최대 증권사인 메릴린치를 인수한 상업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케네스 루이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글로벌 금융시장에 권력이동을 통한 '신질서'가 시작됐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리스크를 감수한 채 복잡한 파생상품을 사고 팔며 떼돈을 벌던 첨단 투자은행들이 '지는 해'라면,예금 유치와 대출영업에 의존하는 구식 상업은행이 '뜨는 해'라는 것이다.

월가의 새로운 질서는 '서브프라임의 복수'로부터 태동하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를 기초자산으로 발행된 복잡한 파생상품이 월가 투자은행들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단 얘기다.

실제로 월가의 주요 5개 투자은행 중 살아남은 곳은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2개뿐이다. 지난 3월 베어스턴스를 시작으로 최근 158년 전통의 리먼브러더스,94년 역사의 메릴린치가 신용위기를 맞아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 베어스턴스를 집어삼킨 JP모건체이스와 메릴린치를 합병한 BOA,웰스파고 등 상업은행이 월가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으며 유럽에서는 독일의 도이체방크,스페인의 산탄데르은행이 '핵심 플레이어'로 떠올랐다. 그동안 투자은행 사업 구축에 주력했던 도이체방크는 지난주 850개 국내 지점을 보유한 도이체포스트방크를 43억달러에 인수,상업은행 부문 확장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상이한 생존방식이 투자은행과 상업은행 간 희비를 갈랐다고 16일 분석했다. 투자은행은 정부의 규제를 덜 받으면서 자유롭게 위험을 감수하고,고수익도 올렸으나 무리한 차입 등으로 파생상품을 만들고 투자한 탓에 위기를 맞았다. 파산보호를 신청한 리먼브러더스는 지난 5월 말 현재 단기차입 규모가 1880억달러에 달했다. 신용위기가 닥쳐 자금줄이 막히면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상업은행은 예금자 보호라는 이유로 정부 규제를 많이 받고 있지만 예ㆍ대(예금ㆍ대출) 마진을 보장받아 착실히 성장해왔다. 지난 8월 말 미국의 예금액은 전년동기에 비해 7.6% 늘어난 6조9000억달러였으며,유럽연합(EU) 지역은 지난 7월 예금액이 6조3000억유로로 12.8%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신용위기가 와도 예금이 완충작용을 하기 때문에 투자은행보다 안전운행을 할 수 있다.

이날 월지는 '월가가 사망신고를 했다'며 월가의 미래를 알려면 네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위스에서 크레디스위스그룹과 UBS가 준정부기관처럼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듯 월가도 BOA,JP모건체이스,씨티그룹 등 소수 금융회사가 미 경제의 운명을 틀어쥘 수 있다고 내다봤다. 투자은행 시대가 가고 사모펀드(PEF)가 그 공백을 메울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했다. KKR와 같은 사모펀드가 리먼브러더스,메릴린치 등에서 떨어져 나와 배회하는 유능한 직원들을 흡수할 것으로 예상했다.

월지는 뉴욕이 글로벌 금융의 중심지로서 누렸던 지위도 내놓게 될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월가에 진출,대박을 꿈꾸려는 미국의 똑똑한 대학 졸업생들의 생각까지 바뀔 수 있다고 덧붙였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