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에 이어 한국은행까지 은행채 매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시중에서 은행채를 사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은행채를 주로 매입했던 자산운용사와 증권사가 자금 부족과 초단기화를 이유로 1년 이상 은행채 매입을 꺼리면서 은행채의 차환발행은 사실상 중단됐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은행들은 고금리 예금 유치에 나설 수밖에 없고,결국 대출금리 인상으로 이어져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이 우려되는 실정이다. 한은의 이 같은 긴급 지원책에 이어 금융감독원도 원화유동성비율 규제를 완화해 은행의 자금 압박을 덜어주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21일 금융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이날 하나은행이 발행한 5년만기 은행채 2000억원어치를 연 7.95%에 사들였다. 국민연금은 전날에도 우리은행과 국민은행의 5년만기 은행채를 2000억원어치씩 같은 금리에 매입했다.

한은도 은행채 매입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은행채 매입은 금융통화위원회 의결사항이라 당장 할 수는 없지만 금융시장 상황에 따라 쓸 수 있는 카드로 설정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은의 RP(환매조건부채권) 담보증권 대상을 공사채 통안채에서 은행채로 확대하면 은행채를 언제든 매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금시장 참가자들은 한은의 은행채 매입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한 증권사 채권담당 임원은 "이달 들어 은행채 롤오버(만기연장 및 차환발행)가 완전 중단된 상태"라고 말했다. 실제 은행들은 연 8% 가까운 금리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 금리에 사가겠다고 하는 민간 금융회사가 전혀 없어 발행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내 만기가 돌아오는 은행채가 25조원에 이르는데 현재의 경색현상이 풀리지 않는다면 '은행발 자금시장 대란'이 우려되고 있다.

그간 은행채의 주요 소화주체였던 자산운용사와 증권사는 현재 여력이 없어 은행채를 살 수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최근 자금경색의 이유 중 하나는 기업들이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미사용 한도대출(마이너스대출)을 100% 소진한 데 원인이 있다"며 "기업들이 대출을 늘린 다음 이렇게 마련한 자금을 MMDA(수시입출금식예금) MMT(단기특정금전신탁) 등 은행의 초단기 상품에 다시 집어넣고 있어 자산운용사와 증권사엔 돈이 없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은 리먼 사태 이후 유동성 위기설이 나돌자 오히려 은행채를 팔고 있다. 한 증권사 자금부장은 "자산운용사들이 증권사에 대한 콜을 줄이다보니 자금 확보를 위해선 은행채를 팔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런 이유로 은행채 금리는 최근 한 달 새 연 6% 후반에서 연 8% 부근까지 치솟았다.

한은에 이어 금감원도 은행 유동성 확보 지원책을 모색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시중은행들이 원화유동성비율 규제 완화를 강력 요청해와 가능성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원화유동성비율이란 잔존만기 3개월 기준으로 원화유동성자산(대출 투자 등)을 원화유동성부채(예금 등)로 나눈 비율로 은행들은 매달 이 비율을 100%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 예금에 비해 대출이 많은 은행들은 이 비율을 맞추기 위해 만기가 3개월 이상인 은행채를 주로 발행해 왔다. 금감원은 이 비율을 △외화유동성비율 가이드라인인 85% 수준으로 낮추는 방안 △점검 기간은 한 달에서 3개월로 늦추는 방안 △잔존만기를 3개월 이상에서 1개월 이상으로 조정하는 방안 등을 놓고 다각적인 검토를 벌이고 있다.

박준동/김현석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