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서울대 교수ㆍ정치학>

한국사회의 지적ㆍ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 흐름을 특징짓는 요소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를 들라면 단연 민족주의다. 이런 현상은 정치사회적 쟁점이 불거지는 과정을 보아도 그렇다. 흥미로운 사실은 개인과 대비되는 국가에 대해서는 '국민의례'보다 '민중의례'를 고집하는 집단이 있을 정도로 혐오감이 심한데,민족은 개인과 반대되는 개념임에도 융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은 물론,북한과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 보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유행하게 됐다. 또 일부 단체에서 임의로 만들고 있는 친일인명 사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친일파'로 몰리고 한·미 우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사람은 미국인보다도 미국을 더 사랑하는 '친미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힐 정도가 됐다. 물론 독도를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이 있고 동북공정을 추진함으로써 고구려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이 있으니,어떻게 민족사랑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과도한 민족주의,특히 저항적 민족주의 과잉은 문제다.

어원적으로 볼 때,민족의 영어표현인 nation은 '태어났다'는 의미를 갖는 라틴어 natus에서 비롯된 것으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언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다른 특별한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민주화 이후 우리사회의 특징이라면 민족주의가 좌파와 결합됐다는 점에 있다.

반일ㆍ반미ㆍ친북을 요체로 하는 좌파민족주의는 제국주의를 경계한다는 명분으로 바람직한 국가 간의 협력 관계조차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는 것도 미국과의 사안이기 때문일 뿐 유럽연합과의 FTA라면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반대도 쇠고기가 문제가 아니라 미국산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좌편향'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에도 우리의 해방과 관련,일장기 대신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니고 성조기였으며,바로 이것이 자주독립을 위한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 비판적이고 북한에 우호적인 경향은 교과서뿐만 아니다.

처음에 '반전반핵'을 외치던 세력들도 북한 핵이 기정사실이 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반핵'은 빼고 '반전평화'만 내세웠다. 또 대한민국의 인권침해를 그토록 비판하던 그들이지만 유례없는 북한의 반인권 상황에 대해선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북한의 핵실험을 계기로 포용정책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면 "그럼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치받는다. 이런 민족주의라면 민족번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재앙을 불러오는 병적인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좌파성향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아닌 '건설적 민족주의'도 있었다. 다만 이것이 그동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한국의 성공적인 산업화는 분명 민족주의의 산물이다. "일본이 잘 사는데 왜 우리라고 잘 살 수 없겠는가"라는 민족자긍심이 달성해낸 것이 산업화다. 용서할 수 없는 일제의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국교를 매듭지음으로써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도 건설적 민족주의의 발로였다. 중동국가와 최초로 선박수출에 관한 상담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국기업의 조선능력을 문제삼자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설득한 것도 민족주의 정신이다.

지금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그 파국에서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종말'이라고 쾌재를 부르는 좌파민족주의보다 우리의 활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건설적 민족주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