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97년 외환위기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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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논설위원·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
배불뚝이 외교가 97년 고립무원의 원인
한·미 스와프협상은 주화파의 성공
IMF(국제통화기금) 위기극복 신화는 빛이 바랜 지 오래다. 치러야 했던 대가가 적지 않았고 증권 만능주의를 골자로 하는 IMF이행 프로그램이라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세계 금융위기를 구성하는 구조악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은 바로 극단으로 치달았던 대미(對美) 경제외교다. 그것의 호된 대가였던 IMF체제는 오늘날까지도 반미 정서의 저변을 구성하고 있다. 이명박 강만수 콤비가 어렵사리 원·달러 스와프를 만들어 낸 것이 미국의 일방적 배려,다시 말해 공짜인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이 미 국채를 월가에 팔아치울 때 일어날 수 있는 미증유의 불상사도 감안했을 것이다. 강만수 장관이 리버스 스필오버(reverse spill-over)라는 말로 특히 그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고 보면 상대의 약점은 제대로 짚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비록 일격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미국이다. 더구나 원화는 세계 어느 나라 은행에서나 바꿔주는 그런 국제통화도 아니다.
"미국채를 팔아치우면 과연 미국에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으냐"는 공갈은 이미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부터 수없이 되풀이되었던 말이다. 홍콩이 환투기 세력의 포위망에 갇혀 난자당하던 1997년 10월에는 중국이,그리고 아시아통화기금(AMF)을 만들려고 뛰어다니던 일본이 1996년부터 되풀이해왔던 공갈이 바로 미국채 매각론이다. 그러나 번번이 동일한 대답이 돌아왔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보시지…!" 중국과 일본의 공갈에 이렇게 맞배짱으로 응답한 사람이 바로 이번에 강 장관이 미국으로 건너가 만났다는 로버트 루빈 전 미 재무장관이다. 갸름한 얼굴에,한국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는 바로 그 사람.
이번 스와프 협상을 보면서 1997년 외환위기가 새삼 통한의 아픔으로 회상되는 것은 아마도 강 장관이 더욱 그럴 것이다. 동분서주의 보람도 없이 기어이 IMF체제로 빨려 들어갔을 때 당시 강만수 차관과 그의 운전기사가 과천 길거리에 차를 세우고 그렇게 울었다는 것이고 보면 강 장관이야말로 모진 교훈의 당사자다. 단 한 대의 미국 자동차도 더 팔아주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단 한 개비의 미국 담배도 더 팔아주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미국산 쇠고기에서 나왔다는 O-157 병원균 문제를 한 달도 넘게 물고 늘어진 역시 유일한 나라가 YS정부의 한국이었다. 미국과의 협상에 나섰던 장관들이 "이번에도 수입을 허용하지 않았노라"고 기자들에게 자랑 삼던 시절이었으니 정작 한국이 필요할 때 그 어떤 우방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는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아무도 물동이를 들고 달려와 주지 않았다"며 절박했던 순간을 회고했지만 실상은 그저 달려오지 않았던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 재경원 차관이 단돈 얼마라도 급전을 꾸어보려고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한국문제는 IMF가 처리할 것"이라는 루빈의 편지가 이미 미야자와 대장상의 책상 위에 도착해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한국은 우리가 손본다'는 엄포에 다름 아니었다. 그랬었다.
금융문제건 군사 문제건 외교 문제는 그렇게 흘러왔던 것이다. 미국에도 할 말은 하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신자유주의를 운운하며 결국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잘한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 비열했던 광우병 난동을 끝까지 견뎌낸 것도 마찬가지다. 강 장관은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도 그를 모시고 다니는 운전기사가 이번에는 길에서 울지 않게 된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강경 척화파만이 득세하는 한국에서 주화파 혹은 현실파가 되기란 매우 어렵다. 명분에 집착하는 오랜 전통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주화파가 거둔 모처럼의 성공이다.
배불뚝이 외교가 97년 고립무원의 원인
한·미 스와프협상은 주화파의 성공
IMF(국제통화기금) 위기극복 신화는 빛이 바랜 지 오래다. 치러야 했던 대가가 적지 않았고 증권 만능주의를 골자로 하는 IMF이행 프로그램이라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세계 금융위기를 구성하는 구조악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은 바로 극단으로 치달았던 대미(對美) 경제외교다. 그것의 호된 대가였던 IMF체제는 오늘날까지도 반미 정서의 저변을 구성하고 있다. 이명박 강만수 콤비가 어렵사리 원·달러 스와프를 만들어 낸 것이 미국의 일방적 배려,다시 말해 공짜인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이 미 국채를 월가에 팔아치울 때 일어날 수 있는 미증유의 불상사도 감안했을 것이다. 강만수 장관이 리버스 스필오버(reverse spill-over)라는 말로 특히 그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고 보면 상대의 약점은 제대로 짚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비록 일격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미국이다. 더구나 원화는 세계 어느 나라 은행에서나 바꿔주는 그런 국제통화도 아니다.
"미국채를 팔아치우면 과연 미국에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으냐"는 공갈은 이미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부터 수없이 되풀이되었던 말이다. 홍콩이 환투기 세력의 포위망에 갇혀 난자당하던 1997년 10월에는 중국이,그리고 아시아통화기금(AMF)을 만들려고 뛰어다니던 일본이 1996년부터 되풀이해왔던 공갈이 바로 미국채 매각론이다. 그러나 번번이 동일한 대답이 돌아왔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보시지…!" 중국과 일본의 공갈에 이렇게 맞배짱으로 응답한 사람이 바로 이번에 강 장관이 미국으로 건너가 만났다는 로버트 루빈 전 미 재무장관이다. 갸름한 얼굴에,한국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는 바로 그 사람.
이번 스와프 협상을 보면서 1997년 외환위기가 새삼 통한의 아픔으로 회상되는 것은 아마도 강 장관이 더욱 그럴 것이다. 동분서주의 보람도 없이 기어이 IMF체제로 빨려 들어갔을 때 당시 강만수 차관과 그의 운전기사가 과천 길거리에 차를 세우고 그렇게 울었다는 것이고 보면 강 장관이야말로 모진 교훈의 당사자다. 단 한 대의 미국 자동차도 더 팔아주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단 한 개비의 미국 담배도 더 팔아주지 않았던 유일한 나라,미국산 쇠고기에서 나왔다는 O-157 병원균 문제를 한 달도 넘게 물고 늘어진 역시 유일한 나라가 YS정부의 한국이었다. 미국과의 협상에 나섰던 장관들이 "이번에도 수입을 허용하지 않았노라"고 기자들에게 자랑 삼던 시절이었으니 정작 한국이 필요할 때 그 어떤 우방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는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아무도 물동이를 들고 달려와 주지 않았다"며 절박했던 순간을 회고했지만 실상은 그저 달려오지 않았던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 재경원 차관이 단돈 얼마라도 급전을 꾸어보려고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한국문제는 IMF가 처리할 것"이라는 루빈의 편지가 이미 미야자와 대장상의 책상 위에 도착해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한국은 우리가 손본다'는 엄포에 다름 아니었다. 그랬었다.
금융문제건 군사 문제건 외교 문제는 그렇게 흘러왔던 것이다. 미국에도 할 말은 하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신자유주의를 운운하며 결국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잘한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 비열했던 광우병 난동을 끝까지 견뎌낸 것도 마찬가지다. 강 장관은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도 그를 모시고 다니는 운전기사가 이번에는 길에서 울지 않게 된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강경 척화파만이 득세하는 한국에서 주화파 혹은 현실파가 되기란 매우 어렵다. 명분에 집착하는 오랜 전통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주화파가 거둔 모처럼의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