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ter Life] 일본 오타쿠도 반해버린 '명동8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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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스리 시요. (때 좀 밀자)"
크리스마스인 지난 25일 저녁,서울 명동 중앙우체국 뒤편 '명동 머드 한증막'.일본 남녀 대학생 5명이 입구에서 표를 끊고 있다. 한국식 전신 때밀이와 아로마 오일 마사지가 포함된 '아카스리 코스'의 1인당 요금은 8만원. 꽤 비싼 편인 데도 한증막 입구는 일본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이곳에서 만난 여대생 니시하라 아이씨(22)는 "일본에선 때미는 욕탕 문화가 없어 한 번쯤 경험해 보고 싶었다"며 "한국에 자주 오다보니 명동 속 '아나바(穴場ㆍ숨겨진 맛집이나 매장을 뜻함)'를 찾는 데 재미를 붙였다"고 말했다.
요즈음 서울 명동은 일본 도쿄의 번화가 '신주쿠'를 방불케 한다. 올초만 해도 100엔당 800원 수준이던 엔화 가치가 지금은 1400원대로 치솟으면서 거리마다 일본인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최근엔 이들의 명동 탐방 트렌드도 바뀌고 있다. 수십명씩 우르르 몰려다니며 관광 안내책자에 나오는 유명 대형 매장만 찾던 일본 관광객들이 명동 구석구석의 맛집,사우나,안경점,병원 등 명동 속 '아나바 탐방'에 푹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명동 오타쿠(お宅)들'8경'은 꼭 간다
명동에서 만난 샐러리맨 다치바나 이즈미씨(35ㆍ남)는 "한류 붐에 일본 내 한국관광 '오타쿠'(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마니아 기질을 가진 사람)가 꽤 많다"며 "오타쿠들이 다양한 경로로 정리해 놓은 명동 내 아나바 맛집과 싸고 품질 좋은 잡화매장,서비스가 우수한 곳 등을 일단 둘러보면 여러 면에서 손해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중앙우체국 뒤편에 있는 '레인보우 안경원'은 명동 오타쿠들을 통해 유명세를 탄 대표적인 사례.1만여 가지 안경테를 구비한 데다 가격이 10만원(7000엔)을 넘지 않아 패션에 민감한 젊은 일본 관광객들이 거쳐가는 필수코스 중 하나다.
대학생 기무라 마사시씨(20ㆍ남)는 "일본에서 렌즈와 안경테를 합쳐 아무리 싸도 1만5000~2만엔 정도 하는데 여기선 3000엔이면 해결할 수 있다"며 "안경사가 일어로 꼼꼼히 설명해줘 바가지 쓴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말했다. 레인보우안경원의 이한동 안경사는 "안경이 완성되면 손님이 묵는 호텔까지 무료로 보내주고 확인 전화까지 해주니 '감동했다'며 또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성형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들의 필수코스는 명동 밀리오레 10층에 있는 '아름다운나라 피부과ㆍ성형외과'.드라마 '대장금'에 반한 회사원 미우라 요시코씨(24ㆍ여)는 "이영애와 똑같은 쌍꺼풀을 해달라"며 이곳을 찾았다. 양쪽 쌍꺼풀 절개 수술에 드는 비용은 70만원으로,일본에서 수술받을 때에 비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미우라씨는 "저렴한 수술비도 마음에 들었지만 여기서 수술한 친구들이 수술 후유증이 거의 없고 연예인 못지않게 예쁘게 변해온 게 부러웠다"고 말했다.
명동 중앙로에 있는 '미나미 발마사지'도 일본인들의 아나바 중 하나다. 발마사지 마니아들이 이곳 서비스의 장점을 명동의 다른 마사지점들과 비교해 동호회 사이트에 자세히 올려 놓으면서 입소문이 퍼졌다. 미나미 발마사지의 가장 큰 매력은 전문 자격증을 취득한 마사지사를 13명이나 확보하고 있다는 것.가격은 코스에 따라 3만~6만원.치마저고리를 입고 한국 전통 병풍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일본인들이 찾는 맛집은
"기무치 좀 더 주세요. " 어눌한 말투로 김치를 주문하는 패션 디자이너 마사다 미키씨(20ㆍ여).한국에 전혀 관심이 없던 그가 작년 겨울 친구와 함께 '명동 교자'(옛 명동 칼국수)를 방문한 뒤 칼국수와 김치 마니아로 바뀌었다. 밥상을 의미하는 우리말 '교자(交子)'가 일본에선 만두를 뜻하는 '교자'(餃子ㆍぎょ-ざ)와 비슷해 일본인들은 만두집인 줄 알고 찾아온다. 마사다씨도 처음엔 만두만 먹을 심산이었으나 칼국수와 매운 김치를 맛보고 그 맛에 반해 버린 것.그는 "최근 일본 10~20대 여성들 사이에 고춧가루가 살빼는 데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김치가 큰 인기"라며 "7000원짜리 칼국수는 면을 몇번이고 공짜로 더 먹을 수 있다는 점도 좋다"고 즐거워했다.
명동파출소 뒤편에 있는 '백제삼계탕'은 올해로 개업 40년 된 명동의 터줏대감이다. 개업 초기 삼계탕은 탕 문화에 익숙지 않은 일본인들에게 혐오 음식 중 하나였다. 그러나 롯데백화점과 가까워 일본인 관광객들의 왕래가 잦고 음식 맛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삼계탕(1만1000원)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주부 마츠무라 하라코씨(33)는 연신 '오이시(맛있어)!'를 외쳐댔다. 그는 "한국에 자주 와본 친구가 이 집 닭고기 육질과 국물이 별미이니 꼭 가보라고 해서 왔는데 역시 소문대로"라고 감탄했다.
일본인들이 즐겨가는 숯불구이 음식점으론 '곰솥집'이 꼽힌다. 소스를 발라 굽는 '야키니쿠(고기구이)'에 익숙해 있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식 직화구이는 고기 맛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줬다는 평이다. 곰솥집의 나중지 점장은 "한우 1+등급 이상만 취급해 가격이 좀 비싼 편이지만 제대로 된 고급 한우를 먹고 싶다며 찾아오는 일본인들로 저녁시간엔 170개 좌석이 꽉 찬다"고 말했다.
◆'욘사마' 화장품 쓸래요
'욘사마' 배용준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내걸린 '더페이스샵' 명동 2호점(66㎡)도 일본인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고등학생 요시무라 미미양(19)은 "욘사마도 왠지 이 비비크림을 사용했을 것 같아 산다"며 5900원짜리 '퓨어 베리 비비크림'을 10개나 사서 쇼핑백에 넣었다. 더페이스샵 점원은 "인기 화장품 브랜드는 매일 일본인들이 무더기로 사가는 바람에 진열대 채우기에 바쁘다"고 하소연(?)했다.
글=장성호 기자 jas@hankyung.com
사진=양윤모 기자 yoonm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