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다산칼럼) 법은 사회적 합의라는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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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규 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한국경제신문 12월 30일자 A30면
'법은 곧,사회적 합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불행히도 법은 사회적 합의가 아니다.
만일 법이 사회적 합의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내기 위한 사회세력들 간의 정치투쟁과 폭력이 일상화하는 오늘의 사태를 '정상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무법천지인 국회가 그렇고 터무니없는 사실의 날조와 선전 선동으로 점화되었던 촛불시위 따위를 결코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 과정이 언제나 과격 그룹의 폭력시위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나 지난 정부가 온갖 교묘한 대중선동적 구호를 동원하면서 위헌적인 종부세법을 만들어낸 것들은 모두 법을 다수 대중의 사회적 합의만 얻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오해와 무지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만 얻어내면 무엇이나 가능하다는 생각만큼이나 정치불안을 구조화하고 법치주의를 무력화하며 결과적으로 국가 기반을 흔드는 폭력적 사고는 없다.
떼법 정서법도 바로 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법을 사회적 합의라고 생각하는 오류들이 끈질기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정치판에는 언제나 3류 정치인들이 들끓게 된다.
이는 멀쩡한 신사들이 예비군복만 입었다 하면 일탈 행동을 두려워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전직 검·판사 변호사 대학교수들이 국회의원 배지만 달면 저질의 난폭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되는 것도 법을 다수 대중의 정서요, 정치 세력들 간에 적당히 주고받는 협상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이라고 이 모두를 법이라고 한다면 이는 실로 통탄할 만한 법에 대한 모욕이다.
히틀러건 스탈린이건 그 어떤 독재자도 벌거벗은 폭력이었던 적은 없었고 소위 합법적이지 않았던 적도 없었다.
사회적 합의,곧 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커야 하고 선전선동에 능해야 하며 바로 그것이 바이마르 헌법이 만들어낸 히틀러라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해 관계가 복잡할수록 국가적 아젠다는 더욱 저차원의 합의점에 도달하게 되고 그것은 또 필연적으로 악순환한다는 점이다.
균형발전론이 그렇고 빈부차 해소 방안들이 그렇듯이 한 번 포퓰리즘의 진흙탕에 들어서면 좀체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사회적 합의는 언제나 더욱 저질인 새로운 합의를 유혹하는 그 자체의 치명적 결함 때문이다.
정치인이 지지율을 높이려면 스스로의 정강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면서 더욱 광범위한,그래서 실제로는 달성 불가능한 약속들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정치판에는 국가를 경영할 진정한 정치인보다는 모든 자에게 그 어떤 선물도 줄 것 같은 실로 무모한(?) 정략가로만 들어차게 된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여의도 입법부의 진면목이다.
누가 어디서 어떤 사이비(似而非) 합의를 보았건 간에 결단코 침해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기본적 인권이며 사적 소유권이다.
이것에 대한 침해는 어떤 합의든 원천무효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법치주의의 접점이 있는 것이다.
1만9000원짜리 금배지를 달았다고 해서 제멋대로 법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여론을 빌미로 임의로 법을 만들거나 폐기하기로 든다면 이는 대중독재에 다름 아니게 된다.
지난 수년간의 입법부가 바로 그런 지경이었고 민주당은 아직도 그것의 마력에 중독되어 있다.
한나라당도 기실 큰 차이는 없다.
법 정신은 오랜 역사 과정 속에서 진화 발전해온 것이지 국회가 그리고 정치가 제멋대로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경제위기 속에서 열린 연말 국회의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면서 법치주의라는 빛바랜 단어를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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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권, 자유권 부인하는 법은 원천 무효
▶ 해설
'고대 그리스의 통치자 크레온은 자신에게 반항하다가 죽은 폴리니케스를 들판에 버려둔 채 장례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다.
반역자의 시체를 까마귀들이 쪼아 먹는 비참한 최후를 시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저항 세력을 억누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죽은 폴리니케스의 누이동생이자 아들의 약혼자인 안티고네는 포고령을 무시하고 오빠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다.
이에 격노한 왕은 안티고네를 산 채로 동굴에 매장토록 명령하게 되고….
아들 하에몬도 아버지와 애인을 화해시킬 수 없음을 알고 애인을 찾아 동굴로 들어가게 된다.
'신의 법'을 어기면 재앙이 온다는 신하의 경고에 크레온은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동굴로 달려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들을 잃고 왕궁으로 돌아오자 왕비마저 목숨을 끓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다.'
그리스의 작가 소포클레스(Sophokles,BC 496~406)의 '안티고네'(Antigone)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떠한 법이라도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자연법 원칙을 전하는 작품이다.
안티고네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치권력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끊임없이 위협해 왔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권한이다.
우리 헌법(10조 37조)도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또 국가 안전 보장 등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더라도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다산칼럼의 필자 정규재 논설위원은 흔히 사회적 합의가 법의 근원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떤 합의를 보았건 간에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기본적 인권이며 사적 소유권이다"는 문장은 자연법을 강조한 것이다.
만일 법이 이를 무시한 채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면 목소리가 크거나 로비력이 좋은 집단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법(실정법)은 자연법을 기초로 할 때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나치도 당시 제정된 '국민 및 국가의 위기 극복에 관한 법률(수권법)'이라는 실정법을 내세웠으나 법이 정당성을 잃어 처벌을 받은 것이다.
철학자 하이에크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회가 이익집단들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원칙을 무시한 채 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한국경제신문 12월 30일자 A30면
'법은 곧,사회적 합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불행히도 법은 사회적 합의가 아니다.
만일 법이 사회적 합의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내기 위한 사회세력들 간의 정치투쟁과 폭력이 일상화하는 오늘의 사태를 '정상 상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무법천지인 국회가 그렇고 터무니없는 사실의 날조와 선전 선동으로 점화되었던 촛불시위 따위를 결코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 과정이 언제나 과격 그룹의 폭력시위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나 지난 정부가 온갖 교묘한 대중선동적 구호를 동원하면서 위헌적인 종부세법을 만들어낸 것들은 모두 법을 다수 대중의 사회적 합의만 얻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오해와 무지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만 얻어내면 무엇이나 가능하다는 생각만큼이나 정치불안을 구조화하고 법치주의를 무력화하며 결과적으로 국가 기반을 흔드는 폭력적 사고는 없다.
떼법 정서법도 바로 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법을 사회적 합의라고 생각하는 오류들이 끈질기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정치판에는 언제나 3류 정치인들이 들끓게 된다.
이는 멀쩡한 신사들이 예비군복만 입었다 하면 일탈 행동을 두려워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전직 검·판사 변호사 대학교수들이 국회의원 배지만 달면 저질의 난폭한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되는 것도 법을 다수 대중의 정서요, 정치 세력들 간에 적당히 주고받는 협상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이라고 이 모두를 법이라고 한다면 이는 실로 통탄할 만한 법에 대한 모욕이다.
히틀러건 스탈린이건 그 어떤 독재자도 벌거벗은 폭력이었던 적은 없었고 소위 합법적이지 않았던 적도 없었다.
사회적 합의,곧 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목소리가 커야 하고 선전선동에 능해야 하며 바로 그것이 바이마르 헌법이 만들어낸 히틀러라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해 관계가 복잡할수록 국가적 아젠다는 더욱 저차원의 합의점에 도달하게 되고 그것은 또 필연적으로 악순환한다는 점이다.
균형발전론이 그렇고 빈부차 해소 방안들이 그렇듯이 한 번 포퓰리즘의 진흙탕에 들어서면 좀체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사회적 합의는 언제나 더욱 저질인 새로운 합의를 유혹하는 그 자체의 치명적 결함 때문이다.
정치인이 지지율을 높이려면 스스로의 정강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면서 더욱 광범위한,그래서 실제로는 달성 불가능한 약속들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정치판에는 국가를 경영할 진정한 정치인보다는 모든 자에게 그 어떤 선물도 줄 것 같은 실로 무모한(?) 정략가로만 들어차게 된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여의도 입법부의 진면목이다.
누가 어디서 어떤 사이비(似而非) 합의를 보았건 간에 결단코 침해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기본적 인권이며 사적 소유권이다.
이것에 대한 침해는 어떤 합의든 원천무효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법치주의의 접점이 있는 것이다.
1만9000원짜리 금배지를 달았다고 해서 제멋대로 법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여론을 빌미로 임의로 법을 만들거나 폐기하기로 든다면 이는 대중독재에 다름 아니게 된다.
지난 수년간의 입법부가 바로 그런 지경이었고 민주당은 아직도 그것의 마력에 중독되어 있다.
한나라당도 기실 큰 차이는 없다.
법 정신은 오랜 역사 과정 속에서 진화 발전해온 것이지 국회가 그리고 정치가 제멋대로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경제위기 속에서 열린 연말 국회의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면서 법치주의라는 빛바랜 단어를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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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권, 자유권 부인하는 법은 원천 무효
▶ 해설
'고대 그리스의 통치자 크레온은 자신에게 반항하다가 죽은 폴리니케스를 들판에 버려둔 채 장례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다.
반역자의 시체를 까마귀들이 쪼아 먹는 비참한 최후를 시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저항 세력을 억누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죽은 폴리니케스의 누이동생이자 아들의 약혼자인 안티고네는 포고령을 무시하고 오빠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다.
이에 격노한 왕은 안티고네를 산 채로 동굴에 매장토록 명령하게 되고….
아들 하에몬도 아버지와 애인을 화해시킬 수 없음을 알고 애인을 찾아 동굴로 들어가게 된다.
'신의 법'을 어기면 재앙이 온다는 신하의 경고에 크레온은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동굴로 달려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아들을 잃고 왕궁으로 돌아오자 왕비마저 목숨을 끓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다.'
그리스의 작가 소포클레스(Sophokles,BC 496~406)의 '안티고네'(Antigone)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떠한 법이라도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자연법 원칙을 전하는 작품이다.
안티고네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치권력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끊임없이 위협해 왔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권한이다.
우리 헌법(10조 37조)도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또 국가 안전 보장 등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더라도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다산칼럼의 필자 정규재 논설위원은 흔히 사회적 합의가 법의 근원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떤 합의를 보았건 간에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기본적 인권이며 사적 소유권이다"는 문장은 자연법을 강조한 것이다.
만일 법이 이를 무시한 채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면 목소리가 크거나 로비력이 좋은 집단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법(실정법)은 자연법을 기초로 할 때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나치도 당시 제정된 '국민 및 국가의 위기 극복에 관한 법률(수권법)'이라는 실정법을 내세웠으나 법이 정당성을 잃어 처벌을 받은 것이다.
철학자 하이에크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회가 이익집단들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원칙을 무시한 채 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