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달러는 휴지가 될 것이다. "블랙먼데이를 예고해 '닥터 둠(Dr.Doom)'이란 별명을 얻은 마크 파버의 얘기다. 그는 "미국은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한정 달러를 찍어내고 있다"며 "당분간은 달러 가치 강세가 지속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폭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달러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달러 가치가 폭락하며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지위가 통째로 흔들린다는 시나리오다. 이는 제2차 대전 이후 세계경제 구조를 지탱해온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 · 달러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질서)'의 몰락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현실화될 경우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태풍의 눈'이 될 것이란 지적이다. 일본의 대표적 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 박사는 "달러의 추락이야말로 세계경제에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이 시나리오의 배경엔 사상 유례없는 미국의 '제로금리'와 '재정적자'가 자리잡고 있다.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를 타개하기 위한 '처방약'이 세계 기축통화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달 16일 금융위기 해결과 경기부양을 위해 기준금리인 연방기금금리를 연 0~0.25%로 낮췄다. 이는 1954년 FRB가 지표금리 제도를 도입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사실상 제로금리 시대를 연 것이다. FRB의 금리인하 다음날 국제 외환시장에서 달러 가치는 장중 한때 유로당 1.4192달러로 추락하며 두 달 반 만에 최저치(달러 약세)를 보이는 등 불안한 움직임을 나타냈다.

미국은 이미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다. 미 재정적자는 지난 회계연도(2007.10~2008.9)에 사상 최대 규모인 4550억달러에 이른데 이어 올해엔 두 배가 넘는 1조2000억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올해뿐 아니라 향후 10년간 재정적자가 연평균 1조달러에 달할 가능성이 있다"(켄트 콘래드 미 상원 은행위원회 의장)는 얘기까지 나온다. 미국의 누적 재정적자는 이미 10조달러를 넘어선 상태다. 국내총생산(GDP)의 72.4%에 달한다. 미국의 지난해 경상수지 적자는 6641억달러로 역시 세계 최대 규모다.

이처럼 '빚더미 경제'의 통화인 달러가 가치를 유지해온 것은 '달러 리사이클링 구조' 덕분이었다. 달러 리사이클링이란 미국의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로 해외로 유출됐던 달러가 미 국채 등 미국 내 자산을 매입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들어오는 현상을 말한다. 2007년 외국인들은 8800억달러의 달러표시 자산을 매입했다. 이처럼 재활용(리사이클링)되는 달러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하며 달러 가치를 유지하는 버팀목이 됐다.

특히 최근 달러는 미국의 금융위기 속에서도 엔화를 제외한 모든 주요국 통화에 대해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확산되면서 투자자금이 다시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는 미 국채 등을 사기 위해 회귀,달러 강세를 부추긴데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미 국채 사재기가 극성을 부리면서 벌써부터 국채 버블 붕괴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국채 버블 붕괴는 달러 리사이클링의 고리를 끊고 달러의 급격한 약세를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제로 금리에 돌입한데 따른 '달러 캐리 트레이드'도 새로운 뇌관이다. 캐리 트레이드란 초저금리 통화로 자금을 조달한 뒤 고수익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기존엔 일본 엔화로 자금을 조달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일반적이었으나 이제 미국 금리도 제로(0)로 떨어진 만큼 달러를 조달통화로 하는 달러 캐리 트레이드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이 경우 달러는 큰 폭의 약세 압력에 노출된다. 마이클 울포크 뉴욕멜론은행의 선임 외환전략가는 "아직은 외환시장 변동성이 높고 전 세계적으로 저금리 기조가 유지돼 달러 캐리 트레이드가 활성화되긴 어렵다"면서도 "하지만 올 하반기부터는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통화전쟁'의 기류마저 흐르고 있다. 달러는 이미 EU(유럽연합) 유로와 중국 위안화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은 통화전쟁의 서곡이었다는 평가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해 11월15일 워싱턴에서 열린 G20 금융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기축통화 역할을 해왔던 달러화가 더 이상 그런 지위를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떠난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EU 순회의장이던 사르코지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달러 기축체제를 바꾸고자 하는 서구 정상들의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도 지난해 10월 말 모스크바에서 만나 현재의 달러화 중심의 기축통화 체제에 반기를 들고 국제통화의 다양화를 주장했다. 특히 중국은 아시아 통화패권에 대한 의욕을 숨기지 않고 있다. 중국 관영 영자지 차이나데일리는 최근 사설에서 "중국이 미 국채 매입을 늘리고 있다고 해서 미국이 다른 나라의 돈을 빌려 금융위기를 해결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면서 "중국이 미국 경제에 대한 자금 공급을 중단하면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달러 폭락이 현실화될 경우 세계 경제에 '핵폭풍'을 몰고 올 수 있다. 미국으로부터의 급격한 자본유출은 주가 폭락을 불러온다. 자본유출을 막기 위한 금리인상은 주택경기 불황을 심화시키고 소비를 감소시켜 미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겪을 수 있다. 가치가 하락해 미국의 구매력이 감소한다면,전 세계적으로 동반 침체가 일어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다. 한국은행은 물론 세계 각국 중앙은행 외환 보유액의 70% 이상이 달러다. 달러 가치가 폭락하면 미 국채 등에 투자한 달러 자산은 휴지가 돼버린다. 또 한국 등 아시아와 유럽 수출국 통화는 상대적인 평가 절상 압력으로 수출에 치명타를 받게 된다. 세계 각국이 달러 폭락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일본경제연구센터(JCER)의 후카오 미쓰히로 이사장은 "현재로선 달러를 팔고 대신 살 수 있는 믿을 만한 통화가 없다"며 "달러 폭락 시나리오의 현실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