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강국] 스티브 잡스·빌게이츠·조앤 롤링 "나를 키운건 동네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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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기꾼을 키워라
회색 옷차림에 넋 나간 표정의 남자들이 좁은 길을 따라 줄지어 걸어간다. 그때 갑자기 붉은 운동복 반바지를 입은 금발 여성이 거대한 해머를 들고 화면 속으로 달려온다. 헬멧을 쓴 전투경찰이 그 뒤를 쫓는다.
행진하던 남자들이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는 비슷한 모습의 수백 명이 공허한 눈으로 전면 벽을 꽉 채운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빅 브러더의 거만한 모습.곧 뒤따라온 금발 여성이 갑자기 해머를 던진다. 공중으로 날아간 해머는 비디오 화면을 박살내고,화면이 폭발하면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사람들의 놀란 얼굴 위로 흩어진다. 그리고 해방을 은유하는 이 장면 위로 자막이 올라간다. '1월24일 애플 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선보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1984가 왜 (조지 오웰의) '1984'와 다른지 알게 될 것입니다. '
1984년 슈퍼볼 경기의 3쿼터 시작 전에 국영방송에서 방영된 60초짜리 이 광고의 위력은 대단했다. 단 일주일 만에 미국 전역의 모든 상점에 진열돼 있던 매킨토시가 매진됐고 그 후 몇 달간이나 주문이 폭주했다. 단 한 번의 광고가 무너져 가던 기업을 회생시킨 것이다.
# 애플 컴퓨터를 되살린 스토리 광고 한 편
당시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IBM의 총 공세로 사면초가 신세였다. 그때 애플을 살린 승부수가 바로 '1984' 광고 한 편이었다. 조지 오웰의 신화적인 소설 《1984》에 새로 창작된 이야기를 포개놓는 기발한 방법.문학의 에너지를 흠씬 빨아들여 멋진 스토리를 재창조한 것이다.
그의 스토리텔러 기질은 애플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퇴출의 아픔을 딛고 영화사 '픽사'를 인수한 뒤에는 '토이 스토리'로 애니메이션의 새 역사를 썼으며 또 다시 '아이폰'과 '아이팟' 신화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그의 프레젠테이션도 스토리텔링의 진수를 보여준다. 잡스는 엔터테이너 뺨칠 정도로 프레젠테이션 내내 청중을 끌어당기고 감동시킨다. 그는 전달하려는 것을 최대한 극적으로 다이내믹하게 만들어 청중에게 '특별한 드라마'를 선물한다. 바로 이 점이 잡스가 최고의 스토리텔러이자 프레젠터로 인정받는 이유이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쟁력이다.
이처럼 '걸어다니는 스토리뱅크'로 불리는 잡스의 힘은 문학 작품에서 나왔다. 그는 아이디어가 막힐 때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을 펼친다. 시적 상상력과 문학적 영감이 그의 모든 이야기의 원천인 것이다. 이는 "나를 키운 건 동네 도서관이었다"는 빌 게이츠의 말과도 상통한다. 빌 게이츠는 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작품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해리 포터' 하나로 300조원?…롤링의 기적
이야기꾼으로 치자면 《해리 포터》의 조앤 롤링보다 더 극적이고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정부의 생활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롤링은 《해리 포터》 시리즈 하나로 세계 최고의 갑부 작가가 됐다. 그가 쓴 7편의 '해리 포터' 시리즈는 세계 전역에서 4억부나 팔려나갔다. 10년 동안 책과 영화,캐릭터상품 등으로 그가 창출한 부가가치는 300조원 이상이다. 이는 최근 10년간 한국 반도체 수출 총액(230조원)보다 훨씬 많은 액수다.
영국 정부가 문화부 조직에 조앤 롤링 전담부서까지 두고 '창조산업' 육성에 몰입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영국에는 자생적인 '스토리 창작 클럽'이 1만여개나 있다. 이들이 처음부터 '돈 되는 문화산업'을 겨냥하고 스토리 클럽을 만든 건 아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재미와 감동의 옷을 입혀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클럽의 영역을 넘어 산업의 지평까지 넓히게 된 것이다.
한때 '해가 지는 나라'로 조롱받던 영국은 마거릿 대처 수상이 '우리가 살 길은 창조산업'이라고 선언한 뒤 스토리 창작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고,그 결과 문화예술 공연 출판 등을 망라한 창조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육박하는 스토리 강국으로 우뚝 섰다. 여기에 관광까지 포함하면 그 비중은 훨씬 높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 '엄숙주의'의 벽 과감히 허물어야
우리나라는 어떤가. 스티브 잡스나 조앤 롤링처럼 '전방위 스토리텔러'가 왜 귀할까. 전문가들은 아직 문화적 인프라가 취약하고 '이야기꾼'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좋지 않은 데다 설익은 엄숙주의까지 드리워진 탓이 크다고 지적한다. 학창시절에 하이틴 로맨스나 장르소설을 읽으며 자랐던 부모들도 아이들에게는 판타지보다 뭔가 교훈을 주거나 학습효과가 있는 책만 골라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의 벽부터 깨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학교에서 '이야기의 가치'를 제대로 가르치고,기업도 신입사원 때부터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주는 프로세스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조앤 롤링 역시 웨일스의 시골 마을에서 어른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벗 삼아 유년기를 보냈기에 환상적인 이야기꾼으로 성공할 수 있지 않았던가.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
행진하던 남자들이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에는 비슷한 모습의 수백 명이 공허한 눈으로 전면 벽을 꽉 채운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빅 브러더의 거만한 모습.곧 뒤따라온 금발 여성이 갑자기 해머를 던진다. 공중으로 날아간 해머는 비디오 화면을 박살내고,화면이 폭발하면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사람들의 놀란 얼굴 위로 흩어진다. 그리고 해방을 은유하는 이 장면 위로 자막이 올라간다. '1월24일 애플 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선보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1984가 왜 (조지 오웰의) '1984'와 다른지 알게 될 것입니다. '
1984년 슈퍼볼 경기의 3쿼터 시작 전에 국영방송에서 방영된 60초짜리 이 광고의 위력은 대단했다. 단 일주일 만에 미국 전역의 모든 상점에 진열돼 있던 매킨토시가 매진됐고 그 후 몇 달간이나 주문이 폭주했다. 단 한 번의 광고가 무너져 가던 기업을 회생시킨 것이다.
# 애플 컴퓨터를 되살린 스토리 광고 한 편
당시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IBM의 총 공세로 사면초가 신세였다. 그때 애플을 살린 승부수가 바로 '1984' 광고 한 편이었다. 조지 오웰의 신화적인 소설 《1984》에 새로 창작된 이야기를 포개놓는 기발한 방법.문학의 에너지를 흠씬 빨아들여 멋진 스토리를 재창조한 것이다.
그의 스토리텔러 기질은 애플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퇴출의 아픔을 딛고 영화사 '픽사'를 인수한 뒤에는 '토이 스토리'로 애니메이션의 새 역사를 썼으며 또 다시 '아이폰'과 '아이팟' 신화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그의 프레젠테이션도 스토리텔링의 진수를 보여준다. 잡스는 엔터테이너 뺨칠 정도로 프레젠테이션 내내 청중을 끌어당기고 감동시킨다. 그는 전달하려는 것을 최대한 극적으로 다이내믹하게 만들어 청중에게 '특별한 드라마'를 선물한다. 바로 이 점이 잡스가 최고의 스토리텔러이자 프레젠터로 인정받는 이유이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쟁력이다.
이처럼 '걸어다니는 스토리뱅크'로 불리는 잡스의 힘은 문학 작품에서 나왔다. 그는 아이디어가 막힐 때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을 펼친다. 시적 상상력과 문학적 영감이 그의 모든 이야기의 원천인 것이다. 이는 "나를 키운 건 동네 도서관이었다"는 빌 게이츠의 말과도 상통한다. 빌 게이츠는 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작품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해리 포터' 하나로 300조원?…롤링의 기적
이야기꾼으로 치자면 《해리 포터》의 조앤 롤링보다 더 극적이고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정부의 생활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롤링은 《해리 포터》 시리즈 하나로 세계 최고의 갑부 작가가 됐다. 그가 쓴 7편의 '해리 포터' 시리즈는 세계 전역에서 4억부나 팔려나갔다. 10년 동안 책과 영화,캐릭터상품 등으로 그가 창출한 부가가치는 300조원 이상이다. 이는 최근 10년간 한국 반도체 수출 총액(230조원)보다 훨씬 많은 액수다.
영국 정부가 문화부 조직에 조앤 롤링 전담부서까지 두고 '창조산업' 육성에 몰입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영국에는 자생적인 '스토리 창작 클럽'이 1만여개나 있다. 이들이 처음부터 '돈 되는 문화산업'을 겨냥하고 스토리 클럽을 만든 건 아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재미와 감동의 옷을 입혀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클럽의 영역을 넘어 산업의 지평까지 넓히게 된 것이다.
한때 '해가 지는 나라'로 조롱받던 영국은 마거릿 대처 수상이 '우리가 살 길은 창조산업'이라고 선언한 뒤 스토리 창작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고,그 결과 문화예술 공연 출판 등을 망라한 창조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육박하는 스토리 강국으로 우뚝 섰다. 여기에 관광까지 포함하면 그 비중은 훨씬 높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 '엄숙주의'의 벽 과감히 허물어야
우리나라는 어떤가. 스티브 잡스나 조앤 롤링처럼 '전방위 스토리텔러'가 왜 귀할까. 전문가들은 아직 문화적 인프라가 취약하고 '이야기꾼'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좋지 않은 데다 설익은 엄숙주의까지 드리워진 탓이 크다고 지적한다. 학창시절에 하이틴 로맨스나 장르소설을 읽으며 자랐던 부모들도 아이들에게는 판타지보다 뭔가 교훈을 주거나 학습효과가 있는 책만 골라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의 벽부터 깨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학교에서 '이야기의 가치'를 제대로 가르치고,기업도 신입사원 때부터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주는 프로세스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조앤 롤링 역시 웨일스의 시골 마을에서 어른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벗 삼아 유년기를 보냈기에 환상적인 이야기꾼으로 성공할 수 있지 않았던가.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