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물을 이용해 논에 물을 대는 이 마을 주민들의 솜씨는 실로 대단했다. 감탄할 만한 관개시설이 아닐 수 없었으니 한국 농부들의 부지런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솔직히 해안 지역의 한국인들은 유약하고 게으르며 미덥지 못한 인상을 주었지만,이곳 내륙 지방에서는 그 같은 판단을 여러모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한국인의) 생활 신조가 다름 아닌 '되도록 돈은 많이,일은 적게,말은 많게,담배도 많이,잠은 오래'였다. 때로는 거기에 주벽과 바람기가 추가된다. 술 취한 한국인이 길거리에 누워 있는 모습은 흔한 구경거리였다. "

1904년 독일 저널리스트 루돌프 차벨이 한국에서 본 두 가지 극단면이다. 그는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예정보다 앞당겨 결혼식을 치른 뒤 신부와 함께 일본에 왔다가 일본 정부의 제한 때문에 취재는 못하고 대신 한국 여행에 나섰다.

이들의 한국 여행은 부산에서 원산을 거쳐 안변,추가령,평강,철원,서울에 이르기까지 2개월간 이어졌다.

그의 여행기 《독일인 부부의 한국 신혼여행 1904》에는 한국과 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의 국제정세와 100여년 전의 풍속이 그대로 담겨 있다. 여행 도중 촬영한 100여 컷의 사진도 흥미롭다.

특히 러일전쟁의 원인을 '뻐꾸기 알'이라고 비유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북쪽에서 내려온 러시아와 남쪽에서 올라온 일본은 압록강 부근에서 양국의 이익을 두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러일전쟁 직전 양국 간에 마지막 외교 교섭이 있었지만 "일본이 만주라는 러시아의 둥지에 자국의 뻐꾸기 알"을 집어넣어 결국 교섭은 결렬됐다. ''뻐꾸기 알'이란 일본이 부산에서 시작해 톈진을 거쳐 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철도 직행 노선을 러시아에 승인 요구한 것을 말한다. 이는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다롄까지 남하하고 있었던 러시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받아들일 경우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내려온 물류가 일본 철도를 거쳐 중국 전역으로 운송되거나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달되어 동북아시아 경제의 중심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낳을 것이 뻔했다. 따라서 러일전쟁은 일본이 원한 전쟁이었음이 분명하다고 그는 적었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