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수동 서강대 리치과학관 10층에 있는 자연과학부 박영재 교수(54)의 연구실.책으로 빼곡한 서가 사이로 한문 족자와 십자고상(十字苦像)이 벽에 걸려 있다. 족자는 중국 선불교의 3조(祖) 승찬대사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적은 것인데 십자고상과 함께 걸려 있으니 이채롭다.

"<신심명> 첫 구절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로지 간택함을 꺼릴 뿐이네(至道無難 唯嫌揀擇).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但莫憎愛 洞然明白)'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원적 분별심만 버린다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죠.'내 수행법이 최고다,내 종교가 최고다'하는 생각은 분별심에 사로잡힌 겁니다. 간화선(화두선)은 물론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도 지극한 도에 이를 수 있으니 <신심명>과 십자고상이 함께 있어서 이상할 게 없지요. "

박 교수는 서강대 물리학과 2학년 때인 1975년 10월 종달(宗達) 이희익 노사(1905~1990년) 문하에 입문한 이래 34년째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생활 속의 수행자다. 원래 조부때부터 가톨릭을 믿었던 집안이라 어릴 땐 성당에 다녔으나 대학 입학 후 삶에 대한 의문과 고민으로 방황하다 법정 스님이 번역한 《숫타니파다》에서 석가모니의 삶을 통해 불교를 접했고,종달 노사를 통해 간화선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박 교수는 수행한 지 12년 만에 스승의 인가를 받았고,이후 숭산 스님의 (점검)지도를 받기도 했다. 스승이 입적한 뒤로는 일반인들의 간화선 수행모임인 선도회의 제2대 지도법사로서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입자물리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만 해도 바쁠 텐데 어떻게 지도법사 역할까지 하고 있을까. 박 교수는 "참선을 하면 집중력이 높아져서 본업을 수행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재가자(스님이 아닌 일반 신자)의 수행은 근무시간에 화두를 들거나 본업과 가족을 팽개친 채 참선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아침에 잠깐 참선한 힘으로 하루를 힘차게,최선을 다해 사는 겁니다. 재가자라고 해서 선방에서 하루 종일 참선하는 스님들보다 수행시간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늘 지금 이 자리에서 깨어있는 주인공으로 살면 각자 하는 일이 바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

박 교수의 삶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매일 잠에서 깨자마자,잠들기 직전 한 시간씩 호흡을 관찰하는 수식관(數息觀)으로 산란한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를 든다. 수식관은 배꼽 아래 단전에 힘을 모으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하나,둘,셋…'하고 마음 속으로 헤아리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행법이다. 연구 중에도 집중이 되지 않으면 연구실 안쪽에 있는 '1인용' 선방에서 반가부좌를 한 채 선정에 든다.

그 결과 교수생활 26년 동안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에 등재되는 해외 학술지에 147편의 연구논문을 실었다. 꾸준히 연구하는 교수들이 보통 1년에 두 편 정도 게재하는 데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수치다. 또 지난 10년간 대학 내 교수업적평가도 교무처장을 맡았던 해를 빼고는 상위 20% 안에 들었다.

"수행한 지 6개월이 지나면서 놀라운 집중력이 생겨서 공부 속도가 빨라졌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본 것은 마치 각인된 것처럼 잊어버리지 않게 됐어요. 평소 5시간 공부할 내용을 1시간이면 끝냈으니까요. 그래서 대학 3학년 때 두 학기 모두 만점(4.0) 학점을 받았죠.10년쯤 수행했을 때 제 가슴에 답답하게 맺혔던 것이 모두 사라지고 텅 빈 체험을 하게 됐고,그 후로는 힘든 일이 닥쳐도 그 일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 일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는 '스트레스 제로(0)' 상태를 지속하고 있지요. "

그래서 박 교수가 이끄는 선도회에는 대학생,교수,교사,주부,예술가 등 각계각층 200여명이 회원으로 등록했고,이 중 80여명이 정기 모임에 지속적으로 나와 수행한다.

또 박 교수처럼 독자적으로 수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수행자를 지도할 수 있는 법사로 인가받은 사람도 김인경 조선대 미대 교수 등 18명이나 된다.

성철 스님의 선 사상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예수회 서명원 신부도 금요일 아침마다 서강대 성당 기도실에서 참선 모임을 갖는 선도회 멤버다. 또 박 교수가 1999년부터 해마다 교양과정에 개설하는 '참선'과목은 대표적인 인기 강좌다.

박 교수는 "간화선 수행은 지도자의 점검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선도회 또다른 가풍은 주어진 시간 중 8분의 1은 좌선하고 나머지는 본업에 매진하는 '좌일주칠(坐一走七)'"이라며 "각자 깊은 수행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걸음걸음마다 맑은 바람이 일 것(步步淸風起)"이라고 덧붙였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