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당시 현오석 KDI원장이 한경 주관으로 리처드 탈러 교수와 특별대담을 하고 있다. / 양윤모기자yoonmo@hankyung.com
2009년 당시 현오석 KDI원장이 한경 주관으로 리처드 탈러 교수와 특별대담을 하고 있다. / 양윤모기자yoonmo@hankyung.com
대담=현오석 KDI원장

남자 화장실을 깨끗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하자'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일 게 아니라,소변기 중앙 부분에 파리 그림을 그리거나 축구 골대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남성들이 일을 볼 때 소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량을 줄이도록 유도하는 게 훨씬 효과적인 방안이다.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과거처럼 정부나 기업체 리더들의 '상명하달'식 일방적 정책집행이 효과를 보기 힘들어지게 됐다. 이런 시대상을 반영하듯 '타인에게 자연스럽게 선택을 유도한다'는 '넛지(nudge)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선 지난해 광우병 파동으로 곤욕을 치렀던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월 휴가를 떠나기 전에 청와대 참모들에게 리처드 탈러 교수의 신간 '넛지'를 선물하며 눈길을 끌었다.

넛지의 개념을 만들어 전파 중인 리처드 탈러 미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교수와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만나 최근 화두로 부상하고 있는 '넛지'의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지난 11일 저녁 서울 삼성동 파크 하얏트호텔에서 가진 대담은 현 원장이 질문을 하고,탈러 교수가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저서 '넛지'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40만부 정도 팔렸다.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놀라운데,출간 4개월여 만에 13만부 정도 팔렸다고 들었다. 중국에서는 나온 지 두 주 정도 됐고,일본에선 조만간 출간된다. 영국에서도 잘 팔렸는데 특히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가 책을 잘 읽고 있다며 관심을 나타냈다. 책 홍보에 정치가들이 나선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명박 대통령이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데,청와대에서 내 책을 대통령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 "

▼인기를 실감하나?

"한국에서 골프를 쳤는데 캐디조차도 내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그 유명한 책의 저자시군요. 저 읽었어요'라고 말해서 놀랐다. 아주 훌륭한 캐디였다(웃음)."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넛지'라는 개념을 간단히 설명해 달라.

"원래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라는 뜻의 단어다.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란 의미로 책에서 사용했다. 특히 정책 결정자가 공공 정책을 결정할 때 부드럽게 개입해 국민들에게 좋은 결과를 유도하는 '사회적 넛지'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 주요 기업과 정부의 리더들에게 어필한 듯싶다. "

▼'넛지'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다시 골프로 돌아가 보자.골프를 치던 중에 한국에서는 미국과 달리 캐디가 '어떻게 칠 것인지' 조언을 하더라.어디에 어떻게 할 것인지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 바로 넛지다. 나는 타이거 우즈도 아닌 만큼 그런 조언은 실제 나의 골프에 영향을 주고,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레스토랑에 가면 굉장히 많은 와인리스트가 있는데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거나 짧게 요약된 추천 와인 등이 큰 도움이 되곤 한다. 수많은 와인리스트 페이지를 읽는 게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20페이지짜리 와인리스트와 2페이지짜리 와인리스트는 다르다. 목적에 따라,취향에 따라 와인별 추천을 만드는 것도 넛지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경제학의 주류인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과'넛지'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신고전파 경제학이 언제나 주어진 정보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가상의 인간을 상정한다면 나의 '넛지'가 그리는 사람은 제한된 합리성의 상황에서,제한된 시간 하에서 선택해야 하는 보통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모든 측면에서 사람들은 다른 전문가의 도움을 얻는다. 특히 경제적 문제에서 삶이란 건 아주 복잡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전화기는 검정색의 다이얼 전화기 한 종류뿐이어서 전화기를 주문하면 똑같은 제품이 왔다. 지금은 휴대폰 종류가 다양해 현 원장님처럼 와튼 MBA를 나오신 분들도 제대로 고르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런 문제는 박사 학위를 받는다고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삶을 편하게 했지만 다른 측면에선 매우 복잡하게도 만들었다. 우리는 천재는 아니기에 소위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가 필요하다. 하지만 신고전파는 '누구도 선택을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큰 실수를 범했다. "

▼그러면 '선택 설계'는 누가 하나.

"우리는 모두 선택 설계를 한다. 캐디도 선택 설계를 하고, 서빙하는 웨이터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이 기후변화에 대한 보고서를 내라고 할 때 1페이지짜리 요약본을 내는 것도 선택 설계다. 50페이지짜리 보고서의 첫 페이지에 무엇을 집어넣을 것인가를 정하는 게 선택 설계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지만 수많은 선택 설계들을 하면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

▼'넛지'와 '개입'의 구분이 좀 애매한 경우도 있는데.

"자전거 타기 캠페인은 순수한 넛지다. 반면 엄격하게 탄소배출을 금지한다고 하면 이는 완전한 개입이다. 하지만 탄소세를 도입해 자연스레 규제한다면 이는 넛지다. 일종의 조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금을 아주 높게 매긴다면 이는 완전한 개입이 된다. "

▼규제 철폐와 넛지의 관계는.

"내가 몸담고 있는 시카고대의 경제학자들은 정부 규제에 대해 아주 불편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을 봐야 한다. 미국의 건강보험 문제를 예로 살펴보자.공화당원들은 정부가 어떤 개입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향도 미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의 16%가 건강보험 관련 분야에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순수한 자유지상주의는 신화에 불과하다. "

▼시카고대에 몸담고 있으면서 경제학계의 큰 학맥인 '시카고 학파'와는 시각이 크게 다른데.

"'효율적 시장가설' 이론을 주창한 내 동료 유진 파머 교수가 시카고대에서 리더십을 쥐고 있는데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웃음). 시카고 학파 사람들과는 계속 논쟁하고 있다. 나나 예일대의 실러 교수 같은 행동경제학자들에 대해 경제학계 주류에선 '경제학을 파괴한다'고 보는 듯한데 우리는 '경제학을 개선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증거에 기반한 경제학이 필요한 시기다. "

정리=김동욱/조귀동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