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섹스& 더 시티] 돈많고 잘생긴 자기야 어딨니?
'남자는 집,여자는 혼수.'

'결혼' 하면 떠올리는 공식이다. 결혼을 준비할 때 대개 남자는 집을 구하고 여자는 집안을 채울 가전,가구 등을 준비한다. 하지만 집값이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다.

서울에서 66㎡(20평형)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려면 2억원을 훌쩍 넘는다. 이제 서른 안팎인 남자들이 고작 2~3년 직장 다녀 모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푸념한다. "돈이 있어야 결혼하지…."

여자들은 어떤가. 요즘 대학 졸업 후 집에 얌전히 앉아 남편감을 기다리는 여자는 찾기 힘들다. 저마다 직업을 갖고 사회활동을 한다. 군대 가는 남자에 비해 2~3년 먼저 직장을 구해 돈도 더 모을 수 있다. 재테크 열풍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자들 역시 결혼할 때 떠올리는 공식은 '남자는 집,여자는 혼수'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경제적 능력에서는 남녀 차이가 좁혀진 지금,여성에게 재테크와 혼테크는 다른 지향점을 갖는다. 혼테크는 여성의 경우 자신보다 경제적 능력이 우월한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생활 수준이 이전보다 한 단계 이상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남녀의 경제적 능력이 대동소이해졌어도 여성들이 혼테크를 갈망하는 이유는 뭘까. 이를 주제로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직장을 가진 미혼 여성 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은 한사코 가명을 요구했다. '혼사길 막힌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5명 모두 '남자=집'이란 공식에 동의했다. 다만,현실적인 제약이 있어 '필수적'이라는 수식어는 달지 않았다. 화장품 업체에 다니는 4년차 직장인 박경인씨(30)는 "여자가 맞벌이하는 것과 남자가 집을 마련하는 것은 별개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여자가 남의 집으로 가는 마당에 여자쪽 집안에서 집 마련할 돈까지 갖다줘야 하나요? 그건 아니라고 봐요. 안 그래도 여자쪽 집안에선 딸을 뺏기는 생각이 들 텐데 말이죠."

최근 들어서는 처가와 본가 구분이 사라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다들 손사래를 쳤다. 시집을 가면 남자쪽 가문으로 간다는 인식이 여전히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잡지사에 근무하는 김현진씨(29)는 "친오빠가 작년 초 결혼했는데 올케가 추석 음식 마련하는 것을 도우러 오지 않으면 화가 난다"며 "여자인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정도니 아직까지는 시댁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여자가 결혼을 생각할 때 남자의 '집안'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집 장만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이현지씨(27)는 "소개팅을 하거나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을 때면 자연스레 생활 수준이 어떤지 알아보게 된다"며 "여자들은 남자쪽 집안이 우리 집보다 최소한 비슷하거나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먼저 결혼한 친구들이 항상 말해요. 혼자 벌어 쓸 때보다 결혼 후에 쓸 수 있는 돈이 더 줄어드니 결혼 전에 사고 싶은 거 다 사라고요. 경조사도 많고 용돈도 챙겨드려야 하죠.아기 낳으면 모아둔 돈까지 다 써야 한다더군요. 다들 괜찮은 집안과 결혼했는데도 그런 말을 할 정도이니,시집에서 집 사는 데 돈을 보태주기는커녕 생활비까지 의존하는 상황이라면 남편감으로는 곤란해요. 동반자가 생기는 것은 좋지만 오히려 생활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원치 않아요. "

여행사 직원인 김은지씨(31)는 "남자가 돈 많이 벌어와야 한다는 생각,집을 해와야 한다는 생각이 20대 때 더 강했다"며 "30대에 들어서니 머리는 아니지만 맘속으로는 바란다"고 털어놓았다.

보통 결혼할 때 남자가 여자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집을 해온다는 인식이 크지 않은가라는 질문에는 대부분이 "남자는 군대를 다녀오기 때문에 나이차가 나도 돈 모아 놓은 것은 비슷하다"며 이해했다. 또 "모성 본능에 따라 자식을 키울 만한 공간을 남자가 마련해주길 바라는 점도 있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욕망의 진화'(데이비드 버스 지음,사이언스북스)에 따르면 미국에서 신문 · 잡지에 실리는 배우자를 찾는 1111개의 개인 광고를 조사한 결과 여성들이 낸 광고문에 배우자가 경제적으로 풍족하길 바란다는 문구가 들어간 빈도가 남성들이 낸 광고문의 11배에 달했다. 또 설문조사 결과 여성은 남성보다 2배 이상 경제적 자원을 중시했다.

데이비드 버스는 "여성은 체내수정,9개월간 임신,그리고 수유라는 엄청난 짐을 짊어졌기 때문에 자원을 소유한 배우자를 선택함으로써 생존과 번식상의 적응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분석했다. 즉 여성들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과 별도로 자신과 가족을 지켜줄 수 있는 능력있는 남자를 원하는데,현대에는 이것이 경제적 능력으로 평가된다는 것.

반면 여자들이 재테크하는 이유로 결혼비용 마련은 절반 미만이다. 인터뷰해본 5명 모두 재테크 이유로 유학비,사업자금 혹은 결혼 후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일부 여성은 돈을 벌어 몸치장하는 것에 집착한다고도 했다. 돈 많은 남자를 '꼬시기' 위한 투자인 셈이다. 이현지씨는 "우리 회사 마케팅부에 마이너스통장까지 만들어가며 치장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여우'로 불렸다"며 "끝내 돈 많고 잘 생긴 대기업 직원과 결혼하는 걸 보니 아끼고 돈 모으는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고 푸념했다. 실제 '성공(?)' 사례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여성들은 적극적인 몸치장을 시도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실패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결혼한 후 집은 당연히 남편 명의로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5명 모두 공동명의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진씨는 "남자들이 대출 끼고 집을 해오는데 결혼해서 같이 갚으니 결국 남자가 집을 해오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대출 끼고 집을 마련했다면 생색낼 게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결혼은 혈연으로 묶이는 동업이라고 생각해요. 남자가 삶의 터전을 제공하면 여자는 그곳에서 실질적인 생활을 꾸려 나가죠.맞벌이로 돈을 벌면서 밥을 짓고 아이를 낳아 키웁니다. 가정에 기여하는 정도를 보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따라올 수 없어요. 공동명의는 욕심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죠."

김씨는 "혼테크는 의사,법조인 사이에서 나돌던 말로 여자가 열쇠 3개(아파트,병원 개업,자동차)를 해오는 것을 가리켰다"며 "혼테크가 여자들만의 것인 양 말하는데 사실은 전문직 남성들이 원조"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남녀들이 남자는 집,여자는 혼수라는 공식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다음 달 결혼을 앞둔 호텔리어 윤미정씨(33)는 자신이 7000만원,남자친구가 6000만원을 모아 전셋집 마련과 결혼비용으로 쓰기로 했다. 윤씨는 "남자쪽 부모님이 한푼도 도와주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남자친구의 형도 같은 방식으로 결혼해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죠.저희 엄마는 어디가서 얘기도 못해요. 사람들 인식은 아직 남자가 집을 해오는 거니까요. 대신 독립심이 강해졌고 시어머니의 혼수 요구가 전혀 없어 좋기도 하고요. "

다른 이들은 윤씨와 같은 경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상외로 대부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박경인씨는 "그만큼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있다는 것"이라며 "요즘에는 반지,시계 정도만 좋은 것으로 하고 남는 돈은 남자가 집을 사는 데 보태는 경우도 흔하다"고 말했다.

남편의 경제적 능력에 대해 김현지씨는 "최소한 나보다 1.5배는 벌어야 한다"고 했다. 육아 문제로 자신은 그만둬도 소비 수준은 유지가 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퇴근시간이 불규칙해 아기를 키우기가 힘들어요. 아줌마를 고용하면 한 달에 150만~200만원씩 드니 버는 게 버는 게 아니죠.또 부모님이 봐주시는 게 아니면 100% 안심하고 맡길 수도 없어요. 오죽하면 '외손자 키워주는 게 30년 전 딸 낳은 데 대한 애프터서비스'라는 말이 있겠어요. "

이현지씨도 "남편이 연봉 1억원 정도 벌어오면 회사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하겠다"면서도 "회사 4~5년 다니고 그런 연봉을 받는 사람이 어딨겠느냐"고 반문했다. "회사에서 대부분의 여자들은 결혼하면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요즘 내조나 현모양처 개념이 달라지고 있어요. 돈 잘 벌고 똑똑하고 얘들 공부 잘 시키고 재테크까지 잘해야 하죠.여자에게 기대하는 게 점점 많아지는 셈이죠.아마 우리 아이들 때에는 남자는 집,여자는 혼수 개념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