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이라는 단어는 때로 심각한 모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노동조합 관련법을 처리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바로 그런 비난을 듣게 되었다. 협상을 위한 협상, 합의를 위한 합의에만 목을 매달다 보니 합의가 없었던 것만도 못하거나 당초 취지를 무색케 하는 거꾸로 합의에 봉착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빚어졌다. 실로 황당한 '정치적' 행태다. 민주주의가 종종 이런 함정에 빠진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이번에는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넘어섰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심하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나라당이 최근 확정한 노동조합 법안은 노조 전임자에게 임금 지급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임금을 주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 되고 말았다. 13년 동안 유예되었던 임금 지급 금지를 이번에는 기필코 시행하자며 노 · 사 · 정 합의가 추진되었던 것인데 협상 결과는 거꾸로 임금을 주도록 강제하는 괴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이 희한한 사태는 한나라당이 집권 여당이라는 사실을 의심케 하거나 의사 무능력 집단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노조법 24조 개정안을 내면서 한나라당은 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할 수 있는 소위 타임오프제가 적용되는 업무에 '통상적인 노조업무'를 포함시켰다. 문제는 이 독소 조항 하나가 전임자 임금을 금지하기 위한 그동안의 논의 전부를 실질적으로 무효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내 한국노총 출신 의원들이 막판에 '통상적 노조 활동'이라는 단어를 쓸쩍 끼워넣었다는 것이 저간의 사연이라지만 이런 엉터리조차 통제할 수 없었던 한나라당은 온전히 그 책임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가 정치에 대해 양보할 수 있는 최저한의 기대치마저 무너뜨리는 행위요 하나의 단서조항으로 조문 전부를 뒤집는다는 점에서 원천 무효다. 구조적으로 3류일 수밖에 없는 정당이라는 조직,그리고 태생적으로 역겨울 수밖에 없는 정치라는 행위의 생래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이런 엉터리가 없다.

타임오프제를 받아들인 노 · 사 · 정 합의라는 것부터가 실은 문제가 많은 것이었다. 전면 금지를 부분 허용으로 바꾸는 이 방안에 노 · 사 · 정이 합의하자마자 일부 국회의원들이 놀랍게도 그 타임오프를 적용하는 업무의 종류에 '통상적 노조 활동'까지 포함시킴으로써 논의 전체를 뒤집어 버리는 무모하고도 놀라운 만용을 부린 것이다. '통상적인 노동조합 관리업무'라는 단어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사용자와의 협의 · 교섭,고충처리,산업안전 활동 등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서 정하는 노사 공동의 이해관계에 관한 업무'란 또 무엇인가. 이는 전임자에 임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아니라 기득권을 인정하자는 법이다.

이는 합의라는 그럴싸한 포장지에 싸인 불법일 뿐이며 협상이라는 번지르르한 간판 뒤에 숨겨놓은 독버섯에 불과하다. 나라의 법을 이렇게도 가벼이 뒤집고 있는 한나라당이며 국회의원이라는 것을 고백하자는 것인지….내년 7월까지 앞으로 6개월 동안 노 · 사 · 정이 공동으로 노조법 시행령이 규정할 타임오프의 조건을 논의하도록 한 것도 실은 우스꽝스런 합의다. 노동 조합법 개정을 위한 토론 과정을 시행령을 만들기 위한 토론 과정에 미루어놓고 있을 뿐이라면 이는 진정한 합의가 아니다. 더구나 복수노조 문제는 아예 2년6개월 뒤로 미루어 놓았다. 이때쯤이면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라는 것을 한나라당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합의하지 않기로 한 합의에 불과한 것을 한나라당은 합의라고 우길 작정인가. 말장난에 불과하다. 전임자 임금 문제에 관한 이번 노 · 사 · 정 합의야말로 그런 꼴이다. 한마디로 13년이나 끌어왔던 전임자 임금 문제는 '주는 것으로' 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 노동정책은 산으로 올라간다.

정규재 <논설위원·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