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을 보면 가세(家勢)가 기울고 있는 부잣집이 연상된다. 2차 대전 후 바닥에서 출발해 세계 2대 경제대국이 된 일본은 1980년대 미국을 집어 삼킬 만한 부를 과시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이후 20년간 불황을 헤매면서 일본은 점점 쇠락하고 있다. 최근 도요타자동차 리콜사태, 일본항공(JAL) 파산, 전자회사들의 삼성전자에 대한 참패 등은 부도난 부잣집에 날아드는 빨간 압류 딱지처럼 보인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노(No) 금메달'까지….그렇게 보면 중국과 한국은 이웃집 신흥 부자라고나 할까.

그러나 일본이 이대로 몰락해 버릴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본은 아직도 무시 못할 부자 나라이고, 재기할 능력도 충분히 갖고 있다. 특히 한국과 비교하면 그렇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2008년 기준 3만9726달러로 한국(1만9231달러)의 딱 2배다. 인구 수를 곱한 전체 경제규모(GDP)는 일본이 4조9107억달러로 한국(9287억달러)의 5.3배다. 한국이 많이 따라 잡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일본은 한참 앞에 서 있다. 일본이 완전히 성장을 멈춰도 한국이 지금부터 10년 동안 연평균 6%씩 성장을 해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일본이 기울어 가는 징조로 GDP의 200%를 넘는 선진국 최악의 국가 부채를 든다. 하지만 그 이면,자산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본은 국가부채 860조엔의 거의 2배인 1500조엔의 금융자산을 개인들이 보유하고 있다. 1970~80년대 고도성장기에 벌어서 저축해 놓은 돈들이다. 일본 정부가 진 빚(국채)의 95%를 외국인이 아닌 국내 투자자들이 대줄 수 있는 능력은 여기서 나온다. 극단적으로 일본 정부가 채무불이행 상태를 맞아도 내부 수습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일본은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외환보유액(약 1조달러)을 갖고 있다. 세계 최대의 대외 순자산(225조엔) 보유국이기도 하다.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면 한국의 원화값은 폭락하지만 일본 엔화는 안전통화로 여겨져 되레 가치가 올라가는 배경이다.

도요타의 리콜로 스타일을 구기긴 했지만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다. 부품 · 소재 분야가 특히 그렇다. 반도체와 LCD(액정표시장치) TV는 한국이 일본을 앞섰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컬러필터나 편광판보호필름 등 핵심 부품은 일본이 세계 시장의 70~80%를 장악하고 있다. 일본 부품 · 소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수출로 돈을 벌면 꼬박꼬박 일정액을 일본에 갖다 바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노벨상 수상자도 일본은 물리 · 화학 · 의학 등 분야에서 15명을 배출했다. 한국은 아직 한 명뿐이다. 한국의 전체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아직도 일본의 5분의 1이 안 된다. 이렇게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에 일본은 쉽게 무너질 나라가 아니다.

1990년대 초 일본의 거품이 꺼졌을 때 한국은 "일본에선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며 무시했다. '일본은 없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건 1993년이다. 그러나 1997년 말과 2008년 말 한국이 외환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래도 손을 벌린 곳은 이웃 부잣집 일본이었다. 요즘 일본이 한국을 배우겠다고 나섰지만, 우쭐할 일이 아니다. 역사적 경험이기도 하지만 일본을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친다. 부잣집은 망해도 3대는 간다고도 했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