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CD 장비업체인 D사는 2008년 키코 가입으로 무려 886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가 지난해 17억원의 흑자전환으로 겨우 한숨을 돌렸다. 이후 수출물량이 증가하기 시작했고,사내에 외환관리 담당자도 있지만 환헤지는 전혀 검토하지 않고 있다. 환헤지라는 단어를 쓰는 자체가 사내에서 '금기'나 마찬가지다.

키코 사태를 촉발시킨 환율 급등 이후 2년여가 지나면서 상당수 중소기업이 피해를 추스르고 대부분 공장도 정상 가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키코에 따른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서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25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기업들의 외환파생상품 거래실적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키코,스노볼,녹아웃콜 등의 통화장외옵션 상품 거래잔액은 2008년만 해도 가입자가 크게 늘면서 3분기에 253조1350억원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그해 4분기 196조4930억원으로 급감했고,지난해 3분기에는 86조7870억원까지 축소됐다. 거래량은 2008년 1분기 대비 10분의 1 이하로 감소했다. 통화장외옵션은 환율이 박스권 안에 있거나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면 이득을 보지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손실로 이어지는 외환파생상품이다. 그동안 수출중소기업들이 주로 가입했다.

손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선물환이나 수출환보험도 중소기업의 외면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전체 선물환 거래 규모는 2008년 3분기 1863조5740억원에서 지난 3분기에는 1076조210억원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금감원에서는 상당수 중소기업이 선물환시장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키코가 유행하기 전 중소기업의 대표적 환헤지 상품으로 꼽히던 수출환보험도 2008년 1분기에는 30억달러를 웃돌았지만 올해 1분기는 3월 말 현재 2억달러 수준에 그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키코에 시달린 수출 중소기업들이 외환파생상품을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다"며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로 원자재를 사들이는,가장 단순한 방식의 환헤지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안용준 티엘테크 대표는 "피해를 어느 정도 추스르고 수출량이 늘어나게 되자 환율컨설팅을 검토하는 기업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며 "하지만 키코에 따른 외상을 치유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키코 피해 기업과 은행의 갈등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난달 은행의 배상 책임이 없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키코 피해기업들은 최근 은행을 사기 혐의로 고발했다. 기업들은 25일 대책회의를 갖고 향후 방안을 논의한 후 다음 달 1일 서울 서초동 중앙검찰청 앞에서 수사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기로 했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