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조태권 광주요 회장 "음식은 그 나라의 품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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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문화로 인정 받으려면 음식은 물론 술·그릇까지 일류여야
한식점들 가격 아닌 고품격 가치 경쟁으로 명품한식 代이었으면
한식점들 가격 아닌 고품격 가치 경쟁으로 명품한식 代이었으면
서울 성북동 주택가 한 켠의 조태권 광주요 회장(62) 집은 고급 갤러리 같은 분위기였다. 점심식사 초대를 받아 들어선 거실에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수십점이 진열돼 있었다. 도자기 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집 다웠다.
조 회장은 외교부 간부 부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식의 세계화' 강의가 길어져 조금 늦는다고 부인 성복화씨가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는 한잔의 소주 칵테일을 권했다. 광주요에서 만든 전통 증류식 소주인 '화요'에 유자청을 넣은 것.달콤 쌉싸래한 맛이 입 안에 퍼질 무렵,조 회장이 바쁜 걸음으로 들어섰다. 흰머리를 뒤로 넘긴 헤어 스타일에 콤비 양복을 입은 그는 선이 뚜렷했다.
조 회장은 "쏟아지는 질문을 받아주느라 좀 늦었다"며 양해를 구하더니 바로 음식 이야기에 들어갔다. "소주칵테일이 약간 쌉싸래해서 식사 전 입맛을 돋울 겁니다. 서양에서 식사 전과 식사 중,식사 후에 먹는 와인이 다른 것처럼 화요도 여러가지 도수로 서빙될 겁니다. "
'한식 세계화의 전도사'인 조 회장과의 오찬은 이렇게 시작됐다. 너른 마당을 바라볼 수 있도록 2층에 마련된 8인용 식탁에 앉았다. 음식을 놓을 밑판과 그릇이 모두 도자기다. 은수저가 반짝 빛났다. 메뉴판에 적힌 8가지 음식 중 첫 음식인 '더덕을 곁들인 새우 애탕국'이 나왔다. 도자기 잔에 따르는 17도짜리 화요와 함께.새우살에 어린 쑥을 다져넣은 완자가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힌다.
조 회장은 대학을 나와 1974년부터 ㈜대우를 거쳐 무기중개상을 하다 1988년 부친이 타계하자 가업인 광주요를 물려받았다.
"도자기 만드는 사람이 왜 음식점을 내고 술까지 만들게 됐습니까. " 툭 던진 질문에 막힘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고급 도자기를 만들다보니 국내에 수요가 별로 없었죠.영업하려고 선진국을 다니다 좋은 음식과 술이 있어야 이를 담을 고급 도자기의 수요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음식과 술이 받쳐줘야 결국 도자기가 크는 겁니다. 식문화가 고급으로 발전하면 거기에 어울리는 그릇이 발전하는 셈이죠."
그는 이 화두(話頭)를 광주요의 주요 수출국인 일본에서 얻었다. 일본은 일식과 술 · 도자기 등의 문화를 묶어 세계에 유행시켰다. "문화란 여러 요소가 연결돼 있는 것이어서 어느 하나만 골라 그것만 발전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이나 그릇 등을 세계에 팔 때도 하나에 그치지 말고 우리 문화를 세트로 팔아야 합니다. "
'돌나물 무침을 곁들인 게살전과 참나물전'에선 향긋한 봄 맛이 느껴졌다. 다음은 '청도 한재 미나리를 곁들인 개성 편수'.메밀로 만두피를 만들었고 이 만두는 청도 한재산(産) 미나리 위에 놓였다. 여기엔 메밀의 소화를 돕는다는 무를 갈아 넣은 간장이 뿌려졌다.
조 회장은 세계 외식산업이 계속 성장할 것으로 봤다.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외식 수요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2020년 외식시장은 5000조원이 넘을 겁니다. 그 중 2000조원이 술입니다. 식문화는 술을 중심으로 발전하죠.선진국에선 보통 음식값의 절반 정도를 와인에 쓰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계인이 마시는 술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
그는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상황이 이런데 우리나라는 고급술에 50%가 넘는 세금을 매깁니다. 발전할 수 없죠.그래서 화요를 만든 겁니다. " 조 회장은 당분간 술사업을 본업으로 삼겠다고 했다. 2005년 내놓은 화요는 지난 1월 다보스포럼의 만찬 테이블에 칵테일 형태로 올랐다. "한식이 고급으로 인정받으려면 함께 곁들이는 술과 그릇이 모두 고급이어야 합니다. "
25도의 화요와 함께 '대파,생강향의 삼겹살찜'이 나왔다. 생강향의 간장으로 요리한 삼겹살은 향도 맛도 부드러웠다.
그는 2003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고급 음식점 '가온'을 차렸다. 2년을 준비해 개업한 가온은 한식이 아닌 한국문화를 파는 곳이었다. 조 회장은 직접 요리사와 함께 전국을 다니며 메뉴를 개발하고 그에 맞는 재료를 찾았다. 스티븐 보즈워스 전 주한 미국대사,두바이 왕자 등이 즐겨찾는 명소가 됐지만 2008년 말 문을 닫아야했다. 그는 "분하다"고 했다. "재정적 이유도 있지만 임대한 건물이 복잡한 권리관계에 얽히는 바람에 새 주인들이 들어와 임대료를 몇 배나 높여달라고 요구했어요. "이렇게 저렇게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단다.
가온은 폐업했지만 문화는 남았다. 류우익 주(駐)중국 대사는 가온의 음식을 좋아해 중국에 부임할 때 요리사 한 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 요리사는 지금 외빈을 주 중 한국대사관에 초청할 때 고급 한국음식을 선보인다. 또 포항에 문을 연 한식주점 '낙낙'(樂樂 · knock knock)은 명소로 자리잡았다. '가온'이 상류층을 겨냥한 것이라면 '낙낙'은 대중 음식점이다.
"음식과 술에 얼마나 돈을 쏟았냐"고 물었다. 그는 빙긋 웃었다. "바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누라도 언젠가 바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난 투자라고 봅니다. "그는 지난해 5월 서울 삼성동 광주요 사옥을 100억원대에 매각해 가온 경영으로 생긴 빚을 갚았다.
조 회장의 도전이 끝났다고 보는 것은 오해다. "가온을 다시 열 겁니다. 광역시 이상에 하나씩 열겠습니다. 낙낙도 각 도시마다 하나씩 열고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 한식 패스트푸드도 연구할 생각입니다. "가온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은 새 요리를 개발하고 있다. 8도 음식을 연구해 코스로 경상도 메인,전라도 메인 요리 등을 만들 계획이란다.
그는 한식의 세계화가 늦어지면서 한식 메뉴를 하나 둘 씩 일본에 빼앗기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일본에선 '기무치'(김치)에 이어 비빔밥을 내놓는 일식집들이 2000여개에 육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한식 세계화의 가장 큰 걸림돌일까. "한국 식문화는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단절됐습니다. 전쟁통에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은 술장사로 터부시됐고,그러다보니 돈있는 사람들은 투자를 안 했죠.이 때문에 음식점하는 사람들이 '가치경쟁' 대신 다들 질을 낮춰 '가격경쟁'만 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돈 가진 사람들이 고급음식점을 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제가 15만원짜리 음식을 만들어 성공하면 남들이 10만원 · 5만원짜리를 만들어 팔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생깁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기업들이 한식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음식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부도 한식을 국책산업으로 만들어서 키워야 합니다. "대중문화를 살리려면 고급문화가 있어야 하고,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폭이 커지면서 문화가 전반적으로 발전할 것이란 얘기다.
'새우젓으로 맛을 낸 도미구이'에 이어 '갈비구이'가 나왔다. 화요 도수도 41도로 높아졌다. 내열도기 뚜껑을 들었더니 도기 안에서 '레어(rare)'였던 갈비는 '미디엄(medium)'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갈비를 석쇠에 구우면 냄새와 연기가 나기 때문에 고급음식이 될 수 없어요. 고급식당에는 고급옷을 입고 가야 하는 데 냄새가 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뚜껑있는 도기를 만들었습니다. "
마지막 요리는 '봄나물 비빔밥과 쑥토장국'이다. 울릉도 전호나물과 유채 등 10가지 나물이 가지런히 밥 위에 놓였다. 그는 요리 하나하나를 설명했다. "고추장은 더덕을 넣은 것입니다. 간장은 달래로 향을 냈어요. 둘 중 하나를 골라 비비세요. 그리고 장아찌는 '보리조기'를 절인 것입니다. "
조 회장은 "문화는 사업의 그릇"이라며 "세계에서 300년 이상된 기업은 술과 음식을 하는 기업밖에 없다"고 했다. 알코올 도수 17도부터 시작된 화요는 식사 진행과 함께 25도,41도로 높여 서비스됐다.
후식과 함께 제공된 마지막 술은 아주 특별한 화요였다. 스코틀랜드에서 공수한 참나무(오크)통에서 2년반 이상 숙성시켜 오크의 은은한 향과 소주의 쌉싸래한 맛이 어우러진 술이다. 화요의 오크통 버전인 '목통주'로 오는 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리기 전인 9월께 1만~2만병 정도로 한정 판매할 예정이다. 아직 이름은 짓지 않았다.
후식인 오미자차와 쑥갠떡,개성약과 등을 먹고 나니 시계가 오후 1시40분을 가리켰다. 식사를 시작한 지 2시간 가까이 흘렀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몰랐던 포만감이 느껴졌다. 문으로 향할 때 요리사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조 회장은 "한식을 널리 알려주십시오"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요리를 먹었더니 속이 편안했다.
글=김현석/사진=김병언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