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말들 ⑥ - ‘장님’과 ‘시각장애인’은 세력다툼 중
가) 장님: '소경'의 높임말. '소경'은 눈이 멀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이른다. 봉사,맹인은 소경과 같이 쓰이는 말이다.

나) 장님: 눈이 먼 사람. 소경이나 봉사 맹인은 모두 같이 쓰는 말이다. 소경은 좀 옛 말투.

다) 장님: '시각장애인' 즉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요인으로 시각에 이상이 생겨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소경이나 봉사와 같이 쓰이며 모두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맹인은 '시각장애인'을 달리 이르는 말.

가)~다)는 우리 국어사전들에 올라 있는 풀이를 옮긴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풀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우선 1992년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큰사전>은 '장님'을 소경의 높임말로 풀이하고 있다.

두 번째 나)의 '장님'은 단순히 '눈이 먼 사람'으로 설명된다. 이는 1998년 연세대 언어정보개발연구원에서 엮은 <연세한국어사전>의 풀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1998년 <표준국어대사전>을 냈는데,여기에서 '장님'은 '낮잡아 이르는 말'로 규정된다.

우리 사전들이 '장님'이란 단어를 두고 '높임말'에서부터 '낮잡아 이르는 말'까지 양극단으로 다루고 있는 모습은 이 말의 쓰임새가 아직 온전하게 자리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님'의 어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사전에서도 그냥 한글로만 표기하고 있다.

다만 '장님'의 '님'은 지금도 '사장님,선생님'처럼 (직위나 신분을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높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와 같은 게 아닐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에서 장님을 '소경의 높임말'로 풀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2005년 민중서관 <새로나온 국어사전> 등 일부 우리 사전들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사회과학출판사, 1992년> 등에서도 같은 풀이를 하고 있다.

이에 비해 2004년 금성출판사에서 내놓은 <훈민정음 국어사전>에서는 '장님'을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 풀고,완곡어 또는 순화어로 시각장애인을 제시한다. 이는 <표준국어대사전>의 관점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전에 '장님'이 대접해 이르는 말이었을 수는 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장님'에서 높임의 의미가 없어진,다시 말해 의미 분화가 진행 중인 단어라는 점이다.

이같이 어떤 단어가 세월이 흐르면서 의미에 변화를 일으켜 본래의 쓰임새에서 벗어나 다른 용도로 쓰이는 일은 흔한 현상이다.

가령 '지랄'은 원래 간질을,'염병'은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또 '병신'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그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의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 모두가 본래의 뜻보다는 주로 욕으로서의 쓰임새로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장님'이란 말도 과거엔 높임말이었지만 요즘은 높임의 의미가 떨어져 나가고 단순히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을 가리키거나 또는 그런 사람을 홀대해 이르는 말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벙어리'나 '절름발이' '앉은뱅이' 같은 말도 <표준국어대사전>에 와서 비로소 '낮잡아 이르는 말'로 규정됐다는 사실은 우리말의 변천 과정에서 주목할 만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벙어리는 언어장애인,장님은 시각장애인,귀머거리는 청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식으로 각각 풀이한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인권 및 복지 의식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영일 터다.

또 벙어리나 장님,귀머거리 같은 말은 장애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OO장애인'은 사람을 중심에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도 이런 대체어들이 세력을 키우게 하는 요인이다.

이들은 완곡어 또는 순화어에 해당한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장님이나 벙어리,귀머거리란 말을 안 쓰고 시각장애인,언어장애인,청각장애인이라 바꿔 쓰다보면 소중한 우리말이 없어져버린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말은 어떤 뜻으로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말 자체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우리 고유어이든 한자어이든 모두 버려서는 안 될 우리말 자산이다.

장님을 쓰든,시각장애인을 쓰든 궁극적으론 언중의 선택에 의해서 그 말의 세력 판도가 결정 날 것이다.

다만 교육을 비롯해 신문 방송 등 공공성이 강한 언어를 쓰는 곳에서는 순화한 말을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 역시 언중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 같은 속담이나 관용적 표현까지 사용을 삼가야 할 일은 아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