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에 관한 간단한 글을 집필해야 될 일이 있어 정말 오래간만에 박제가의 '북학의'를 다시 읽어보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책이라 이번에도 감동을 준다. 조선 후기 사회도 오늘날 못지 않게 혼란스러운 사회라 허위의식이 판을 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두 가지의 예를 들어본다.

우선 소중화주의가 있다. 명나라가 오랑캐인 청나라에 망했으므로 중화문화는 우리 조선에만 남게 되었으니,이제 중국으로부터는 더 배울 것이 없고,병자호란 때 당한 수모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중화주의는 허위의식이었다. 조선에는 청나라에 복수할 만한 국력이 없었고,청나라는 강희 · 옹정 · 건륭 등 3대에 걸쳐서 중국 5000년 역사상 가장 빛나는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소중화주의는 실제로는 인민들의 대청복수심을 이용한 노론 일당의 장기집권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인민들은 오랜 기간 노론 일당이 펼친 몽매정책의 희생물이 되었다.

다음으로 절약사상이 있다. 조선 정부는 인민들이 부유해지려면 절약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실상은 인민들이 절약할 형편이 못되었다. 한 동네에서 하루 두 끼를 먹을 수 있는 가정이 두세 집에 불과하고,장정도 1년에 무명옷 한 벌을 얻어 입기가 어려우며,이불이 없어서 거적을 덥고 자식을 기르는 형편인데 그들이 무엇을 더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인가. 본래 경전에서 절약하라는 말은 국가 재정을 절약하라는 것인데,왕실은 호의호식하면서 인민들에게 절약하라고 하는 것은 가난에 대한 지배층의 책임회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렇게 읽다 보니 우리 시대의 허위의식도 조선 후기에 못지 않은 것 같다.

우선 민주 대 반민주라는 구도이다. 진보는 민주이고 보수는 반민주라는 것이다. 이 말이 1986년 민주화 이전의 귄위주의 시대에 나온 말이라면 그 나름의 의미는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진보가 민주화 운동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는 근거 없는 말이다. 진보가 과거 10년간의 집권기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준 일이 있는가. 국민들이 무슨 소리인지도 알아듣지 못하는 참여민주주의를 떠들다가 자유민주주의마저 혼란에 빠트린 것 말고 한 일이 무엇인가.

그들이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려면,자유민주주의와 다른 번듯한 민주주의 모델을 국민들 앞에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 민주화 시대에 아직도 남에게 민주주의를 하라고 손가락질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

둘째,반미자주의식이 있다. 반미자주의식은 2002년 대선 때의 촛불시위나 2008년의 광우병파동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바 있다. 그런데 이렇게 반미의식의 뿌리가 깊은 데는 역사적 근거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경험이 그 배경일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반미주의자들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를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시대로 보고 있음이 틀림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이해는 현대 세계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가 아니겠는가. 해방 이후 미국은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식민지화하지 않았다. 1953년의 한미방위조약으로 지금까지도 전시작전통제권을 틀어쥐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그것이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기본조건이 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국제협력의 시대에 반미자주의식이나 고취하는 것은 조선 후기의 소중화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셋째,평화주의다. 한국의 평화주의는 대개 대북평화주의다. 그간 남북이 체제경쟁을 하던 시대에는 한국에서 북진통일론이나 반공통일론이 득세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북한의 대남무력도발은 간단없이 전개되었지만,한국이 북한을 무력으로 침략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한국이 햇볕정책을 충실히 전개하고 있을 때도 북한은 끊임 없는 무력도발을 한 것이 사실이 아닌가.

더구나 김정일이 자기 가문의 생잔을 위하여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면서 북한 2000만 동포를 노예화하고 있는데도,김정일에게는 평화적으로 대해야만 할 것인가. 그렇다고 전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대북 평화주의만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