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사태,헝가리 사태 등 글로벌 경제가 불안해질 때마다 일본 엔화가 초강세를 나타내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일본 경제의 회복세가 그다지 빠른 편이 아니고,한때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벌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특이한 일이다.

여기에다 일본의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배를 웃돌아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나쁘고 국가 신용등급 강등 위험까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역설(paradox)'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하지만 1조달러를 웃도는 외환보유액,막대한 경상수지 흑자 등 일본 경제의 기초체력이 탄탄하고 위기 때마다 엔캐리 자금이 일본으로 환류되고 있어 엔화가 미국 달러화와 마찬가지로 안전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원 · 엔 환율 한 달 새 14% 올라

8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 · 엔 환율은 전날보다 9원54전 내려 1344원87전을 기록했다. 전날 60원 가까이 치솟아 경계감이 확산된 데다 이날 원 · 달러 환율이 1233원40전에 마감,전날보다 2원50전 내린 결과다.

하지만 원 · 엔 환율은 그리스 재정위기가 본격화하기 직전인 지난달 3일과 비교하면 14.1% 급등했다. 지난달 3일 원 · 엔 환율은 1178원44전이었다.

엔화는 그리스와 헝가리 사태를 거치면서 전 세계 거의 모든 통화에 비해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 기간 미국 달러화에 대해 유로화 가치는 10%가량,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6% 정도 하락했지만 엔화가치는 3%가량 상승했다.


◆일본 경제의 저력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은 미국만큼이나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성장률을 보면 미국이 2008년과 지난해 각각 -2.4%와 -5.4%로 후퇴했지만 일본 역시 각각 -1.2%와 -5.2%로 비슷한 상황이다.

재정건전성 측면에선 일본이 미국은 물론 최근 위기를 겪은 남유럽 국가보다 더 열악하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17.6%에 이른다. 그리스의 112.6%와 비교하면 두 배 수준이다. 재정적자 비율 역시 10.5%로 11.2%의 스페인과 엇비슷하고 헝가리의 7.5%를 크게 웃돈다.

피치는 만약 일본의 재정건전성이 지금보다 더 악화된다면 현재 AA-인 국가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 중인 몇 안 되는 국가다. 지난 4월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1조2421억엔에 이르렀다. 현재의 엔 · 달러 환율을 적용하면 133억달러에 달한다. 일본의 연간 경상수지 흑자규모는 2007년 24조8000억엔,2008년 16조4000억엔,지난해 13조3000억엔을 각각 기록했다.

여기에 1조달러를 웃도는 외환보유액이 일본의 강점이다. 지난 4월 말 현재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조469억달러로 2조4471억달러인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일본은 막대한 국가채무를 짊어지고 있지만 이 가운데 외국인에게 지고 있는 빚은 6.2%에 불과하다. 구본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일본에서 국가채무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분석했다.

◆와타나베 부인의 귀환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해질 때마다 엔화가 강세를 나타내는 또다른 비밀은 엔캐리트레이드의 청산이다. 엔캐리트레이드란 초저금리인 일본에서 자금을 마련해 달러 등 외화로 환전한 뒤 일본 외 국가에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 주부들이 해외에다 투자하는 사례가 2005년부터 급증하면서 이들을 '와타나베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엔캐리 자금은 리먼 브러더스 파산,두바이월드 사태,그리스 사태,헝가리 사태 등 국제금융시장이 얼어붙을 때마다 청산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와타나베 부인'들은 위기 때마다 수익을 좀 덜 내더라도 안전하게 일본에서 자금을 굴리자며 일본으로 자금을 들여오고 있다.

이 같은 엔캐리 규모가 상당하기 때문에 위기 때마다 엔화가 강세를 나타내는 현상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한 은행 외환딜러는 "엔캐리 자금 규모가 적게는 2000억달러,많게는 1조달러 이상이란 게 금융계의 판단"이라고 전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