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대·중기 상생과 正義문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정부 개입은 기득권 체제만 강화
최고의 公正은 시장경쟁서 나와
최고의 公正은 시장경쟁서 나와
'정의'(正義)라는 일견 낡은 가치를 우리 앞에 다시 드러낸 사람은 존 롤즈다.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살아갈 사회의 규칙을 정한다고 생각해보자"로 시작되는 그의 정의론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득권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규칙을 정한다면 필시 공정한 규칙이 될 것이라는 사고실험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 경우라면 사람들은 우선 권리와 의무를 평등하게 배분하고자 할 것이며 혹 차등을 용인하더라도 최소수혜자에게도 무언가의 이익이 보장되는 그런 규칙을 정하게 될 것이라는 게 롤즈의 유명한 '정의의 두 원칙'이다. 자유시장이 아닌 사회시장경제라고 부를 만한 그의 분배 철학은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M 샐든을 비롯한 많은 정의론자들에게 영감을 주어왔고 시장을 규제하고 공리주의를 대체하려는 시도를 고무시켜 왔다.
롤즈에 따르면 정의(正義)는 공정(公正:fairness)으로 정의된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공정하냐 아니냐'로 정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이 8 · 15경축사를 통해 강조한 바로 그 공정이다. 물론 공정 개념이 그 결과에 상관 없이 누구라도 받아들일 만한 사전적 준거틀이 된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가 아니라면, 공정은 작게는 개인들의 계약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권력을 배분하는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적 행위의 보편적 기준이 되고 있다. 우리가 입시제도를 논하거나 삶의 현장에서 크고 작은 가치를 배분하는 기준에 대해 열을 올릴 때도 그 준거는 공정이다. 이는 정의를 "무엇이든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라고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한 규칙인가를 정하는 구체적 작업에 들어가면 문제는 꽤 복잡해진다. 배구선수에게 축구의 규칙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공정한 체계라는 것은 영역에 따라 종종 매우 혼란스런 기준이 되고 만다. 더구나 공정하게 분배할 무언가를 누군가는 만들어 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정의론자들에게는 아쉽게도 만인에게 가장 확실한 지속 가능한 공정 규칙은 그 어떤 가정 하에서도 시장경제라는 일반적 규칙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사고실험이 아닌 역사의 실험에서 검증된 그대로다.
시장이라는 공정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지난 3세기 동안 가장 치열하게 평등성을 달성해 왔고 한국에 이어 중국의 십수억 인구가 봉건시대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시장의 힘이야말로 온갖 종류의 기득권을 철폐해왔고 그 결과로 누구든 능력에 따라 자신의 밥그릇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인류사의 발전이라는 공동의 전망을 가능케 하는 공정한 체계로서의 시장 경쟁 원칙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문제도 그렇다. 이들 간의 거래가 불공정하다고 말할 때 그 판정기준은 무엇인가. 하나의 대기업과 하나의 중소기업만을 생각한다면 현실의 거래는 매우 불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한건의 납품 계약을 따내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여러 개 중소기업의 존재를 동시에 생각한다면 이들 중소기업 간의 공정 규칙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만일 오직 하나의 대기업과 하나의 중소기업만 존재하는 경제라면 국가가 직접 공익적 납품단가를 정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무수한 중소기업이 존재하고 다행히도 각기 치열하게 경쟁하는 무수한 대기업들이 존재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 수만 건에 달하는 나날의 거래와 계약들을 관통하는 공정한 잣대는 결국 각자의 치열한 계산에 의존하는, 경쟁이라는 잣대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공정한 기준을 세울 수 있겠는가. 시장원칙이 아닌 그 어떤 기준도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사람들은 때때로 잊고 있다.
정규재 논설위원 겸 경제교육硏 소장
롤즈에 따르면 정의(正義)는 공정(公正:fairness)으로 정의된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공정하냐 아니냐'로 정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이 8 · 15경축사를 통해 강조한 바로 그 공정이다. 물론 공정 개념이 그 결과에 상관 없이 누구라도 받아들일 만한 사전적 준거틀이 된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가 아니라면, 공정은 작게는 개인들의 계약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권력을 배분하는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적 행위의 보편적 기준이 되고 있다. 우리가 입시제도를 논하거나 삶의 현장에서 크고 작은 가치를 배분하는 기준에 대해 열을 올릴 때도 그 준거는 공정이다. 이는 정의를 "무엇이든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라고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한 규칙인가를 정하는 구체적 작업에 들어가면 문제는 꽤 복잡해진다. 배구선수에게 축구의 규칙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공정한 체계라는 것은 영역에 따라 종종 매우 혼란스런 기준이 되고 만다. 더구나 공정하게 분배할 무언가를 누군가는 만들어 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정의론자들에게는 아쉽게도 만인에게 가장 확실한 지속 가능한 공정 규칙은 그 어떤 가정 하에서도 시장경제라는 일반적 규칙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사고실험이 아닌 역사의 실험에서 검증된 그대로다.
시장이라는 공정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지난 3세기 동안 가장 치열하게 평등성을 달성해 왔고 한국에 이어 중국의 십수억 인구가 봉건시대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시장의 힘이야말로 온갖 종류의 기득권을 철폐해왔고 그 결과로 누구든 능력에 따라 자신의 밥그릇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인류사의 발전이라는 공동의 전망을 가능케 하는 공정한 체계로서의 시장 경쟁 원칙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문제도 그렇다. 이들 간의 거래가 불공정하다고 말할 때 그 판정기준은 무엇인가. 하나의 대기업과 하나의 중소기업만을 생각한다면 현실의 거래는 매우 불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한건의 납품 계약을 따내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여러 개 중소기업의 존재를 동시에 생각한다면 이들 중소기업 간의 공정 규칙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만일 오직 하나의 대기업과 하나의 중소기업만 존재하는 경제라면 국가가 직접 공익적 납품단가를 정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무수한 중소기업이 존재하고 다행히도 각기 치열하게 경쟁하는 무수한 대기업들이 존재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 수만 건에 달하는 나날의 거래와 계약들을 관통하는 공정한 잣대는 결국 각자의 치열한 계산에 의존하는, 경쟁이라는 잣대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공정한 기준을 세울 수 있겠는가. 시장원칙이 아닌 그 어떤 기준도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사람들은 때때로 잊고 있다.
정규재 논설위원 겸 경제교육硏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