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한국경제신문 정규재 논설위원겸경제교육연구소장이 8월17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쓴 칼럼입니다.

공정한 사회의 기준을 어떻게 세울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 소장은 시장원리가 가장 공정한 기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글 전문을 싣습니다.
[Cover Story] 대기업-중소기업의 相生과 正義문제
'정의'(正義)라는 일견 낡은 가치를 우리 앞에 다시 드러낸 사람은 존 롤스다.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살아갈 사회의 규칙을 정한다고 생각해보자"로 시작되는 그의 정의론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득권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규칙을 정한다면 필시 공정한 규칙이 될 것이라는 사고실험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이 경우라면 사람들은 우선 권리와 의무를 평등하게 배분하고자 할 것이며 혹 차등을 용인하더라도 최소 수혜자에게도 무언가의 이익이 보장되는 그런 규칙을 정하게 될 것이라는 게 롤스의 유명한 '정의의 두 원칙'이다.

자유시장이 아닌 사회시장경제라고 부를 만한 그의 분배 철학은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M 샐덴을 비롯한 많은 정의론자들에게 영감을 주어왔고 시장을 규제하고 공리주의를 대체하려는 시도를 고무시켜 왔다.

롤스에 따르면 정의(正義)는 공정(公正:fairness)으로 정의된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공정하냐 아니냐'로 정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8 · 15경축사를 통해 강조한 바로 그 공정이다.

물론 공정 개념이 그 결과에 상관 없이 누구라도 받아들일 만한 사전적 준거틀이 된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가 아니라면, 공정은 작게는 개인들의 계약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권력을 배분하는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적 행위의 보편적 기준이 되고 있다.

우리가 입시제도를 논하거나 삶의 현장에서 크고 작은 가치를 배분하는 기준에 대해 열을 올릴 때도 그 준거는 공정이다.

이는 정의를 "무엇이든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라고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한 규칙인가를 정하는 구체적 작업에 들어가면 문제는 꽤 복잡해진다.

배구선수에게 축구의 규칙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공정한 체계라는 것은 영역에 따라 종종 매우 혼란스런 기준이 되고 만다.

더구나 공정하게 분배할 무언가를 누군가는 만들어 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정의론자들에게는 아쉽게도 만인에게 가장 확실한 지속 가능한 공정 규칙은 그 어떤 가정 하에서도 시장경제라는 일반적 규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사고실험이 아닌 역사의 실험에서 검증된 그대로다.

시장이라는 공정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지난 3세기 동안 가장 치열하게 평등성을 달성해 왔고 한국에 이어 중국의 십수억 인구가 봉건시대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시장의 힘이야말로 온갖 종류의 기득권을 철폐해왔고 그 결과로 누구든 능력에 따라 자신의 밥그릇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인류사의 발전이라는 공동의 전망을 가능케 하는 공정한 체계로서의 시장 경쟁 원칙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문제도 그렇다.

이들 간의 거래가 불공정하다고 말할 때 그 판정기준은 무엇인가.

하나의 대기업과 하나의 중소기업만을 생각한다면 현실의 거래는 매우 불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한 건의 납품 계약을 따내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는 여러 개 중소기업의 존재를 동시에 생각한다면 이들 중소기업 간의 공정 규칙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만일 오직 하나의 대기업과 하나의 중소기업만 존재하는 경제라면 국가가 직접 공익적 납품단가를 정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무수한 중소기업이 존재하고 다행히도 각기 치열하게 경쟁하는 무수한 대기업들이 존재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 수만 건에 달하는 나날의 거래와 계약들을 관통하는 공정한 잣대는 결국 각자의 치열한 계산에 의존하는, 경쟁이라는 잣대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공정한 기준을 세울 수 있겠는가.

시장원칙이 아닌 그 어떤 기준도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사람들은 때때로 잊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겸 경제교육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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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경매로 입학생을 뽑는다면 정의로울까?

미국의 많은 대학이 동문 자녀에게는 입학사정에서 약간의 혜택을 준다.

공동체 의식과 애교심을 키운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 더해 자녀의 입학을 고맙게 여긴 동문이 기부금을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한다.

시험성적이 낮더라도 기부금을 내놓은 학생들을 선발하는 기여입학제는 허용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정원의 10%를 경매에 부쳐 높은 가격을 부른 사람에게 입학을 허가한다고 해보자.

이런 경매가 정의로울까.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하버드대에서 '정의(Justice)'라는 주제로 30년 가까이 정치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수업은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현실의 법적 · 정치적 논쟁을 다룬다.

정의를 묻는다는 것은 대체 뭘 묻자는 것일까.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를테면 소득과 부,의무와 권리,권력과 기회,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눠준다.

분배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행복 · 자유 · 미덕이다. 각기의 강조점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벤담,롤스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우리의 고민을 대신했다.

군대를 보자.징병제와 지원병제가 있고,유급대리인을 허용하는 남북전쟁 당시의 징병제도 있다.

자유야말로 지상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이에겐 징병제는 강제성을 띤 일종의 노예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자에게도 지원병제가 최고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징병제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미국 프린스턴대의 경우를 보자.1956년에는 졸업생 750명 가운데 과반수인 450명이 군에 입대했다.

2006년에는 졸업생 1108명 가운데 고작 9명이 군에 입대했다. 자유로운가.

2008년에 모집된 미군의 25% 이상이 정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대학 문턱을 넘어온 사람은 6.5%다. 계층 간 불공평이 존재한다는 근거다.

군 복무는 여러 직업 중 하나가 아니라 공동체의 신성한 의무라는 입장에 선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경우 어느 쪽이 정의일까.

이런 문제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다뤄질 수 있을까.

정의 논쟁,철학 논쟁이 아니라 이념논쟁이 될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현실적 정의를 찾아나서는 것,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이념가가 아니라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