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소비재 업체 임원 K씨(43)는 작년 초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어느날 갑자기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기억력이 확 떨어지는 이상 증상이 나타난 것.매일 후배들을 닦달하며 들려주던 영업 노하우도 가물가물해졌다.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급기야 자살 충동까지 느끼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는 석 달간 휴직한 뒤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 결과 마음의 평안을 되찾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왔다.

한국 직장인의 정신건강이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수준으로 악화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서울대병원 강남센터와 공동으로 지난해 7월부터 올 6월까지 1년간 이 센터에서 기업체 단체검진을 받은 대기업 임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이 전체의 13%인 65명에 달했다. 과거에 우울증을 앓았던 사람까지 합치면 25%가 우울증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 임원의 우울증 유병률은 국내 의학계가 추정하고 있는 일반인 평균 유병률(9%)보다 훨씬 높다. 이는 임원들이 일반인에 비해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우울증 및 스트레스증후군을 호소하는 임원들의 46%가 무기력증,25%가 불면증을 겪고 있어 정신적 · 신체적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병원의 윤대현 정신과 교수는 "스트레스의 80%는 업무와 관련한 것으로 경영 일선에서 퇴진할 우려,승진 경쟁 · 사업 승계에 대한 부담감,실적 악화,업무 과다,팀원과의 갈등이 주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는 간부들조차 자기 정체성에 관한 고민거리를 많이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녀교육을 위해 가족을 해외에 내보내 '기러기 생활'을 하는 탓에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기업들은 우울증이 잦은 결근과 이직,업무태만 등 조직을 좀먹는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대책 마련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25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임직원 심리상담소 운영실태'를 조사한 결과 이 중 14개사가 임직원을 위한 정신건강 상담실을 운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중공업은 회사 인근의 울산대병원에서 정신과 진료를 쉽게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진료비까지 지원하고 있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