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어 올해도 쌀 조기 관세화가 무산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됐던 것이라고 농업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정부가 '농민단체들과의 합의'를 쌀 관세화를 통한 시장개방의 전제 조건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지적이다. 특단의 지원책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농민단체들이 순순히 시장 개방에 동의해줄 것이라는 정부의 기대는 지나치게 안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조기 관세화 불발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해에도 쌀 조기 관세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일부 농민단체들의 반발에 부딪쳐 토론회조차 제대로 열지 못했다. 그래서 올해는 민간 기구인 농어업선진화위원회 쌀 특별분과위원회를 통해 농민단체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주력했다.

농식품부는 지난 7월 말까지 전국 토론회를 열고 쌀 조기 관세화에 대한 합의를 유도했다. 그러나 일부 농민단체들은 "시장 개방을 하려면 우선 쌀 직불제 강화 등의 종합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농식품부는 예산 등의 문제 때문에 힘들다는 입장을 보였다.

양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합의가 힘들 것이라는 전망은 몇 달 전부터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 조기 관세화에 적극적인 유정복 장관이 취임했지만 이달 말까지 관세화 추진 의사를 세계무역기구(WTO)에 통보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대외경제조정회의와 국무회의 등을 거쳐야 하고 국회에 통보도 해야 하기 때문에 늦어도 지난달 말까지는 농식품부가 '결단'을 내렸어야 한다는 얘기다.

민간 농업연구소 GS&J의 이정환 이사장은 "정부가 농민단체들의 반발이 무서워 눈치만 보다가 기회를 놓쳤다"며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문제여서 몸을 사린 것 같다"고 말했다.

◆경제적 피해 더 커질 듯

현재 쌀 재고는 149만t으로 적정 비축량을 77만t이나 초과하고 있다. 재고쌀(149만t) 가운데 50만t을 밥쌀용이 아닌 가공용 등으로 긴급 처분키로 결정할 만큼 쌀이 남아돌고 있다. 공급 과잉으로 지난해 15만원대이던 쌀(80㎏) 가격은 최근 13만원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해 농식품부가 지난달 말 내놓은 긴급 대책의 핵심은 올해 생산되는 쌀 가운데 예상 수요량을 넘어서는 40만~50만t을 모조리 매입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예산을 투입해 수급 균형을 맞추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조기 관세화가 불발로 끝나면서 내년에는 올해보다 2만여t 많은 34만7000여t을 의무 수입해야 한다. 정부의 매입 물량과 맞먹는 규모를 외국에서 반드시 들여와야 한다는 얘기다.

의무수입 물량은 한 번 늘어나면 줄지 않기 때문에 예컨대 2012년부터 관세화를 시행하더라도 34만7000여t은 계속 수입해야 한다. 관세화를 하지 않으면 남아도는 쌀을 수출하는 것도 금지된다. 자국의 쌀 시장을 보호하는 국가가 수출을 하는 것은 자유무역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태호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쌀 시장을 개방하더라도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기 때문에 국산 쌀의 가격 경쟁력은 충분하다"며 "수입쌀이 대량으로 들어올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말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

◆ 쌀 조기 관세화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대신 2014년까지 매년 2만여t씩 쌀 수입을 늘리기로 합의한 '2004년 우루과이라운드(UR) 재협상 결과'를 파기하고 관세화로 시장을 열겠다는 것.관세화가 이뤄지면 쌀 국제가격 차이에 근접하는 수준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지만 쌀 시장은 개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