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화 기행] (20) 나폴리가요제 1등 '오 솔레 미오' 카루소 앨범 통해 전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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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탈리아 나폴리
음악 전통 숨쉬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17세기 '음악학교' 유럽 전역서 명성
치즈·바질 얹은 '마르게리타' 일품
음악 전통 숨쉬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17세기 '음악학교' 유럽 전역서 명성
치즈·바질 얹은 '마르게리타' 일품
'한낮의 눈부신 태양,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또 다른 태양이 있다오/ 그것은 바로 그대의 얼굴을 비추는 나의 태양이라오.'(디 카푸아의 '오 솔레 미오' 중에서)
주말 아침 따사로운 햇살이 내 얼굴을 어루만질 때마다 난 습관적으로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나폴리 민요집 CD를 오디오 플레이어에 걸곤했다. 뒤돌아볼 틈 없이 내달은 한 주의 끝자락.파바로티의 미성에 실린 나폴리 민요는 언제나 지친 육신과 경직된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 중에서도 '오 솔레 미오'를 들을 때면 내 마음은 착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지중해를 향해 두 팔을 벌린 미항 나폴리의 부둣가로 향하는 것이었다.
나폴리 민요라고 해서 수백년 전부터 민간에 구전돼온 노래들이려니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게 전부 '노래자랑'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곡들이다. 나폴리 에르겔리나 지구에 있는 한 성당에서 매년 '피에디그로타의 축제'를 열었는데 1835년부터 부대 행사의 하나로 노래 경연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축제는 1950년대까지 120여년간 계속돼 이탈리아 대중가요(칸초네)의 산실이 됐다. '오 솔레 미오'는 물론 우리 귀에 익은 '산타 루치아' '돌아오라 소렌토로' '후니쿠니 후니쿨라'가 모두 이 콘테스트의 입상작들이다. 이탈리아 대중가요 콘테스트도 다 나폴리의 가요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폴리의 대중가요를 전 세계인의 애청곡으로 만든 공로는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는 유럽에서 활동하다 나중에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는데 당시 미국에선 막 근대적인 스타 시스템의 출현으로 대중매체를 활용한 홍보,레코딩을 통한 대량판매 시스템이 정착돼가고 있었다. 새로 출현한 레코드 녹음에 대해 대부분의 성악가들이 관객과의 교감이 없다며 거부반응을 보인 데 반해 카루소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무려 260여 차례의 레코딩으로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그는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대중가요도 레코딩했다. 그 덕분에 나폴리 민요는 카루소의 대중적 인기를 업고 레코드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후 성악가들은 대중과의 교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카루소의 전례를 따랐다.
나폴리는 오래전부터 음악적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그 전통을 꽃피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한때 나폴리를 지배하던 스페인 왕가였다. 16세기 중반 이 왕실은 나폴리의 네 성당에 콘세르바토리를 설립했다. 당시 성당에선 갈 곳 없는 고아들을 보호하고 교육했는데 '보호한다(conserve)'는 말은 17세기에 들어와 음악학교를 의미하게 된다. 음악은 고아들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후 나폴리의 음악학교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유학을 올 만큼 전성기를 구가한다. 스카를라티,페르골레지,벨리니,도니제티 같은 정상급 음악가들이 모두 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나폴리는 오페라에서 강세를 보였다. 코믹 오페라인 '오페라 부파'는 이곳에서 탄생했으며 스토리의 완결성보다는 개별 노래의 아름다운 발성을 중시하는 '벨 칸토' 창법도 이곳에서 발아됐다. 그 중심 무대는 산 카를로 극장이었다. 18세기 중엽 왕궁 옆에 지어진 이 극장은 지금도 이탈리아 오페라 공연의 중심지로서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산 카를로 극장과 왕궁 왼쪽에는 19세기 초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난도 1세가 건설한 널따란 프레비시토 광장이 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반원형의 광장이 옛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고 있다.
음악의 도시 나폴리는 기원전 9세기에 그리스의 식민지로 건설된 후 유럽의 정치 · 문화적 중심지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수많은 왕조들이 이 항구도시를 탐냈다. 로마의 식민지를 거쳐 12세기에는 노르만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13세기에는 프랑스 앙주가와 스페인 아라곤가의 통치를 받았다. 16세기에는 다시 스페인,18세기에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이곳을 지배했다.
다양한 문명이 교차한 덕분에 나폴리는 베네치아 못지않은 이국적인 풍취를 뿜어낸다. 2차 세계대전으로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많이 파괴되긴 했지만 아직도 나폴리는 유럽 역사의 축소판이라 불릴 정도로 다종다양한 건축물들이 과거를 증언하고 있다.
나폴리는 사람들의 귀만 즐겁게 해주는 곳이 아니다. 여행에 지친 길손의 입을 즐겁게 해주는 식도락의 천국이기도 하다. 그 즐거움의 일등공신은 바로 피자다. 피자는 원래 가난한 사람들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만들어 먹기 시작했지만 재료가 다양화되면서 평민에서부터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즐기는 나폴리의 대표 명품 요리로 자리 잡게 된다.
내가 처음 맛본 이탈리아 피자는 '마르게리타'였다. 평평한 밀가루 반죽 판 위에 붉은 색 토마토와 물소 젖으로 만든 흰색의 모차렐라 치즈,녹색의 신선한 향초 바질을 얹어 벽돌 화덕에 구운 이 피자는 1889년 제빵사인 라파엘레 에스포시토가 움베르토 1세 국왕과 마르게리타 왕비의 나폴리 방문을 기념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에스포시토는 국왕 부처에게 세 가지 피자를 내놓았는데,왕비가 이탈리아의 삼색 국기를 연상케 하는 이 피자를 좋아해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마르게리타 피자가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명물 피자가 탄생한 '피즈리아 브란디'는 플레비시토 광장 부근에서 아직도 성업 중이다.
홍합 등 조개를 듬뿍 집어넣은 봉골레 스파게티도 나폴리를 대표하는 명물 중의 하나다. 데뷔 초 카루소는 나폴리의 누오보 극장 공연에서 관중의 야유를 받았는데 이때 자존심이 상해 공연 직후 다시는 고향에서 노래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멋쩍게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나폴리에 돌아오는 경우는 오로지 스파게티를 먹을 때뿐"이라고.자타가 공인하는 미식가였던 그로서는 나폴리는 잊어도 나폴리의 스파게티 맛은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 솔레 미오'를 작곡한 디 카푸아의 꿈은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가의 꿈을 접고 칸초네 작곡가의 길을 선택했다. 몇몇 히트곡을 작곡했지만 가난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의 곁을 서성일 뿐이었다. 그는 작곡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투전판을 헤맸지만 행운의 여신은 늘 그를 외면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시름 속에서 52세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불후의 명곡 '오 솔레 미오'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해 오늘도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의 꽃을 심어 주고 있다. 그 자신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그의 노래는 오늘도 모든 이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으니 그의 꿈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이뤄진 셈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 소렌토·카프리섬으로 또 다른 여행의 시작점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그 경관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산타 루치아'에 잘 묘사돼 있다. 그러나 나폴리는 여행의 끝이 아니다. 나폴리 주변엔 아름다운 관광지와 역사 유적지들이 사방에서 길손을 유혹한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묻혀버린 폼페이는 방문자들을 2000년 전의 세계로 안내한다. 18세기 중반부터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이곳에선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폴리 민요 중 하나인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무대인 소렌토는 나폴리 만을 사이에 두고 나폴리를 마주보고 있다. 작고 아름다운 이 도시는 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나폴리에서 30㎞ 떨어진 카프리섬은 나폴리 관광 때 놓쳐서는 안되는 방문지로 통한다. 이 섬은 로마시대부터 황제와 귀족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높았는데,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푸른동굴 속을 나룻배에 몸을 싣고 가다보면 어느덧 세상의 시름도 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