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미국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경제대국들의 환율 전쟁에 휘말려 들고 있다.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경기 침체를 막으려는 주요국들의 치열한 싸움에 원 · 달러 환율이 급락(원화가치 급등)하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다.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환율 급락을 막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지만 환율조작국으로 찍힐 우려가 있어 섣불리 나서기 어렵다. 환율 하락세가 추세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위기가 시장에 확산되면 외국자본이 대거 유입되고 주가와 채권가격이 치솟게 된다. 한국은행이 금리 인상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시중금리는 되레 떨어지는 이유다. 통화정책이 제 기능을 상실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환율 쳐다만 보는 당국

외환당국은 이달 들어 원 · 달러 환율이 50원이나 떨어졌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외환시장 참가자들은 "예전이라면 1160원 아래에서 외환당국이 속도 조절을 위한 시장개입에 나섰을 텐데 이번에는 아무런 액션이 없다"고 전했다. 원 · 달러 환율은 지난달 1198원10전에서 추석 연휴 직전인 20일 1161원30전으로 떨어졌지만 외환당국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24일과 27일 2거래일 동안 13원10전이나 추가로 떨어졌다.

외환당국이 쉽사리 시장에 개입하지 못하는 것은 미국의 강경한 태도 때문이다. 미국 하원 세입위원회는 환율조작이 의심스러운 국가에서 들어오는 수입품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최근 통과시켰다.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되지만 자칫 한국이 희생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일단 동향을 지켜보는 것 외에 외환당국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시장에선 보고 있다.

외환당국 관계자는 이에 대해 "외국의 외환정책 및 환율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 정책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외환당국은 지나친 쏠림을 경계하되 기본적으론 시장기능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견지해 왔다.

◆환율 하락으로 회복 지연 불가피

한국은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3%에 달할 만큼 대외의존도가 높다. 우리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견뎌낸 것도 고환율에 힘입은 바 크다. 실제 지난 상반기 중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4.3%나 늘었다. 수출 급증으로 설비투자가 30.1% 증가했고 GDP도 7.6% 늘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내년 평균 환율 전망치 1110원에 기초해 수출 증가율이 한 자릿수(8.5%)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출 증가율이 둔화돼 성장률 역시 3.8%에 머물 것이란 게 이 연구소의 관측이다.

환율이 이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하락하면 수출 증가율과 성장률 모두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장에선 단기적으론 1130원,연말까지는 1100원 수준까지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골드만삭스는 3개월 환율 전망치를 1150원에서 1100원으로 낮췄다. 모건스탠리는 연말 원 · 달러 환율 전망치로 1075원을 제시했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균형환율 수준을 고려했을 때 1100원 선 안팎까지 하락할 것"이라며 "단기적으로는 더 내려갈 수 있다"고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적절한 수준'에서 외환당국이 시장에 참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이기 때문에 대외신뢰도 차원에서 무역수지 흑자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외환당국이 환율 하락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

이진우 NH선물 리서치센터장은 1140원 부근에서 당국 개입을 예상했다. 그는 "1140원은 2003~2004년 외환당국이 개입을 통해 장기간 지켜냈던 중요한 레벨"이라며 "이번에도 비슷한 가격대에서 당국이 개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책주권 상실 우려도

글로벌 환율전쟁으로 인해 통화당국이 금리정책을 제때 펴기 힘들다는 것도 한국의 고충 중 하나다. 한은은 경제성장률에 비해 연 2.25% 수준의 정책금리(기준금리)가 지나치게 낮은 수준이며 향후 물가 상승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환율이 급락하면서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리기가 쉽지 않은 형국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린다면 내외금리차가 더 커져 외국자본의 유입을 부추길 수 있다. 이는 환율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해 수출 및 경제성장 전반에 걸쳐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더군다나 미국이나 일본은 중앙은행이 통화공급을 늘리는 양적완화로 통화가치 절하를 유도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점을 한은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은 관계자는 "자칫 한은만 환율전쟁에 뒷짐을 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외국자본 유입은 이미 한은의 통화정책 실효성을 상실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외국자본은 올 들어 한국 채권시장에서만 55조원어치를 사들였다. 이 때문에 한은이 지난 7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하고 추가 금리인상을 시사하고 있지만 시장금리는 하락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일본이 엔고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한국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원화 절상을 유도할 가능성마저 점치고 있다.

박준동/유승호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