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일본에 특파원으로 부임한 직후 초등학생인 아이를 동네 수영교실에 보내고 답답해 했던 적이 있다. 일주일에 3번씩 석 달을 보냈지만, 배워 온 것이라곤 발로 물장구치는 것뿐이었다. 한국 같았으면 호흡법은 물론 자유형 평영 배영을 익혔을 시간이다. 일본 수영교실에선 넉 달째 돼서야 팔 젓는 법과 호흡법을 가르쳤다. 기초인 발 물장구가 확실히 숙련돼야 수영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수영강사의 설명이었다.

그걸 보며 기초를 중시하는 일본을 실감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노벨화학상 발표를 보고 일본의 기초력을 다시 절감했다. 올해 노벨화학상 수상자 3명 중 미국의 리처드 헤크 델라웨어대 교수(79)를 제외한 두 명이 일본인이다. 스즈키 아키라 홋카이도대 명예교수(80)와 네기시 에이이치 미국 퍼듀대 교수(75)다. 이들은 의약품이나 전자재료 등 다양한 공업물질을 손쉽게 합성할 수 있는 혁신적 유기합성법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는다.

이로써 일본은 과학분야에서만 노벨상 수상자 14명(미국 국적자 포함하면 15명)을 배출했다. 미국(234명) 영국(76명) 독일(68명) 프랑스(29명) 스웨덴(16명) 스위스(15명)에 이어 세계 일곱 번째다.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한 명도 못 낸 한국으로선 부러울 따름이다. 단지 노벨상 수상자가 많아서가 아니다. 노벨상 수상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탄탄한 기초과학이 산업경쟁력을 떠받치고 있어서다.

이번에 노벨화학상을 받는 스즈키 교수가 고안해낸 유기합성법은 액정표시장치(LCD)와 유기 전기발광소자(EL) 등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됐다. 치소나 도소 같은 일본 화학회사들은 1990년대 중반 이 기술을 응용해 LCD재료를 양산한 뒤 세계 시장을 장악했다. LCD TV는 세계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1등이지만, 삼성전자도 LCD의 핵심 재료와 부품은 일본에서 수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일본이 기초과학에 강한 데는 이유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물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서양을 따라잡기 위해 기초과학에 힘을 쏟았다. 최고 인재를 육성하는 도쿄대를 1877년에 설립했고,기초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RIKEN)를 1917년 만들었다. 1990년엔 50년 동안 3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다는 '50-30프로젝트'를 만들어 투자를 집중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 동안에도 국내총생산(GDP)의 2% 정도를 꾸준히 연구개발(R&D)에 투자했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 중 40%가 기초과학에 들어갔다.

반면 한국은 1970년대까지 당장 돈이 되는 생산기술과 응용과학에만 치중했다. 정부가 기초과학연구 지원을 본격화한 것은 1989년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을 제정한 이후다. 출발 자체부터 한참 늦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규모도 일본의 4분의 1 수준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메모리 반도체나 LCD TV에서 일본을 앞질렀듯이 기초과학도 하면 된다.

무엇보다 기초과학에 대한 국가적 투자 확대가 절실하다. 한 우물을 파는 연구자를 존경하고 대우하는 문화도 만들어야 한다. 짜여진 입시교육이 아닌,다양성을 인정하고 창의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 교육 개혁이 이뤄진다면 금상첨화다. 이렇게 기초를 다져야 과학이 발전하고,노벨상 수상자가 나온다. 삼성전자 등의 승승장구에 마냥 우쭐거릴 때가 아니다. 한국은 과학기술의 '물장구'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