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의 피부는 약간 가무잡잡했다. 콧등이 유난히 높은 매부리코에 무질서하게 기른 콧수염,단호하게 다문 입으로 보아 자존심이 대단해보였고 무표정한 얼굴에선 일견 방자함까지 느껴졌다. 그는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는 타고난 반골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뜻밖에도 한 사내와 막 동거를 시작했다. 빈센트 반 고흐라는 다소 병약해 보이는 화가와 말이다. 사실 폴 고갱은 이 사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집불통에다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그의 감정은 너무나 섬약했고 편집적이라 자신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이 서른다섯의 병든 화가와 함께 살 마음을 굳힌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 돈이 없었다. 증권중매인이던 고갱은 실직을 계기로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소에 꿈꿔왔던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가족과 헤어진 그는 브르타뉴에 기거하면서 지출을 최소화하며 버텨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점점 빚에 의존해 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손을 내밀었다. 파리의 화상인 테오는 고갱의 재능을 알아보고 작품을 사줬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생활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여서 그는 계속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테오를 통해 이런 사정을 알게 된 고흐는 테오에게 고갱을 설득해 자신과 함께 지내도록 권유해줄 것을 요청했다. 오래 전부터 화가 공동체의 건설을 꿈꾸던 고흐는 이것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중에게는 외면받던 고갱이지만 고흐를 포함해 많은 젊은 화가들이 그를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내려오면 공동체의 꿈을 좀 더 빨리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테오로서도 병약한 몸으로 아를(Arles)에서 외롭게 지내는 형에게 고갱과의 동거는 형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테오가 고갱의 부채를 모두 갚아주는 성의를 보이며 설득했기 때문에 고갱으로선 뭔가 최소한의 보답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결국 아를을 방문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게다가 당장 생활비도 없었던 그는 테오가 기차표까지 끊어주며 등을 떠미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프로방스의 청명한 가을 햇빛이 아를의 들판에 사뿐히 내려앉기 시작한 10월23일 아침 고갱은 고흐와 합류한다. 고흐는 고갱을 환영하는 뜻으로 그가 쓸 방에 호두나무 침대를 마련하고 벽에는 자신이 그린 '해바라기'를 장식했다. 고갱이 온 후 집안의 주도권은 이 시건방진 방문객의 손으로 넘어갔다. 식사 메뉴를 정한 것도 고갱이었고 요리도 대부분 고갱이 직접 했다. 주객이 전도되긴 했지만 심약한 고흐는 동생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갱에게 감정적으로 크게 의지했다.

고갱은 고흐와 함께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고 때때로 함께 아를 시내의 투우장에 가서 성난 황소와 투우사의 대결을 지켜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밤에는 함께 사창가를 드나들며 라셸이라는 어린 창녀에 탐닉했다. 외모와 기질은 달랐지만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의 화신인 점에서 둘은 닮은꼴이었다. 처음에 둘의 관계는 좀 티격태격하기는 해도 그런대로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입장에서 그들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심연이 가로놓여 있었다. 사물의 색채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림의 생기를 앗아간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그것이 그들이 공유한 전부였다. 고갱이 보기에 고흐는 충동에 사로잡힌 낭만주의자였다. 그의 눈에 이 내성적인 동거인은 지적인 작업과는 거리가 먼 우연적인 효과에나 기대는 어설픈 화가였다. 전통적인 회화의 원칙들을 버리고 윤곽선의 도입과 원색의 과감한 사용 등 추상성에 바탕을 둔 그의 '지적인' 작업은 고흐의 작업과는 화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둘은 예술 얘기만 나오면 사사건건 대립했다. 고갱은 동료작가인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자신이 존경하는 앵그르,라파엘로,드가 같은 인물은 싫어하면서도 자신이 싫어하는 도데,도비니,장 자크 루소 같은 인물을 좋아한다고 불평했다. 둘의 논쟁은 점점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특히 상대편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고갱의 무례한 비판은 고흐에게 뼈아픈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결국 둘의 만남은 고갱의 결별 예고와 이에 예민해진 고흐의 자해사건(자신의 귀를 자른)으로 두 달 만에 파국을 맞는다.

두 사람의 갈등의 무대가 된 아를은 원래 로마의 식민지 거점 도시로 '갈리아의 작은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고대 이탈리아 문명의 색채가 짙게 배어나는 곳이다. 지금도 도처에서 원형투기장,원형극장 등 고대의 유적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고갱과 고흐가 자주 찾은 로마시대 공동묘지 알리스캉은 시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둘은 이곳에서 야외 작업을 한 후 시내 포럼광장에 위치한 '밤의 카페'에 들러 독주 압생트를 마시며 예술을 논했다. 고흐는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기 한 달 전 이 카페의 밤 풍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이 그림에서 카페는 노란 색으로 채색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흐가 야광에서 받은 느낌을 임의로 재해석한 색채일 뿐 원래는 노란색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금도 성업 중인 이 카페(저녁에 연다)의 노란색 외관은 1990년대에 복원공사를 하면서 고흐의 그림과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서 노란 색으로 칠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의 명성이 본래 카페의 모습까지 바꿔놓아 흥미롭다.

고갱이 두 달간 신세졌던 고흐의 집은 지금 없어졌는데 아를 기차역 아래의 라마르틴 광장에 있었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후 강제 수용됐던 아를 병원은 포룸광장 아래 강베타 거리에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아 있고 현재는 리노베이션을 거쳐 '에스파스 반 고흐'라는 이름 아래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고갱과 고흐의 아를에서의 만남은 서양 현대미술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의 하나로 기억된다. 성격과 기질이 판이했던 두 화가의 동거는 실패로 끝났지만 논쟁의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의 색깔을 분명히 인식하게 됐고 이후 이들이 쏟아낸 작품들은 아를 시절에 정립된 각자의 창작원리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 결과 고흐는 현대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가 됐고 고갱은 상징주의 미술과 피카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12년 전 오늘 자신의 발 아래 6펜스짜리 은화가 떨어진 것도 모른 채 아를에 온 고갱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현대미술은 지금쯤 다른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 '달과 6펜스'로 고갱을 읽다

영국 소설가 윌리엄 서머싯 몸은 1919년 고갱의 생애를 모델로 한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스트릭랜드라는 중년의 주식중매인이 안정적인 수입과 안락한 가정을 버린 채 예술가라는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한동안 파리를 배회하던 주인공이 남태평양의 한 외딴 섬에 들어가 작업에 몰두하던 중 매독에 걸리고 장님이 되지만 생애 최대의 걸작을 완성한 후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그런 선택을 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 점은 소설의 제목에 암시돼 있다. 달과 6펜스짜리 은화는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둘의 성질은 판이하다. 달이 영적인 빛,내적 예지를 상징하는 반면 6펜스짜리 은화는 노동자의 하루치 임금에 해당하는 액수로 천박한 물질적 욕망을 상징한다. 곧 달은 영적 세계,본원적 감성의 세계이며 6펜스는 물질세계,인습에 얽매인 타성적 욕망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제목은 스트릭랜드가 타성적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나 영적인 본질의 세계로 나아감을 암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