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영국항공(브리티시에어웨이)은 새 비즈니스석을 선보였다. 두 개의 좌석을 에스(S)자 형태로 마주볼 수 있게 배치해 공간을 넓힘으로써 180도로 완전히 누울 수 있게 했다. 새 디자인이 인기를 얻자 1등석 좌석도 바꿨다. 이후 올해까지 10년간 비즈니스석과 1등석 판매로 거둔 영업이익은 10조4000억원.세계 항공업계가 비즈니스석 디자인을 경쟁적으로 바꾸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영국항공의 비즈니스석을 디자인한 사람이 이돈태 영국 탠저린디자인 공동대표(42 · 사진)다. 홍익대 미대 교수,삼성물산 디자인고문 등도 맡아 영국과 아시아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 대표를 최근 '영국 디자인 세미나'가 열린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만났다.

이 대표는 산업디자인에도 '스마트' 바람이 불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더 이상 밖으로 보이는 게 디자인이 아니다"며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게 첨단 '스마트'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아이폰이 대표적인 예다.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디자인(invisible design)'을 통해 사용자가 편하고,자랑스럽게 느끼도록 만들었다는 것.그는 "스마트 디자인은 소비자가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구현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디자이너뿐 아니라 심리학자 등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이 디자인에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아이폰을 디자인한 애플의 수석 부사장 조너선 아이브는 탠저린 출신이다. 애플과 외주 작업을 하던 중 1997년 스티브 잡스에게 스카우트돼 아이팟,아이맥 시리즈 등을 그려냈다. 이 대표는 "아이브는 애플에서 연구 · 개발(R&D)을 총괄하며 엔지니어를 데리고 제품 발상에서부터 디자인까지 책임진다"며 "이제는 10년 뒤 제품도 디자이너들이 발상을 하는 시대"라고 덧붙였다.

홍익대,영국 왕립예술대에서 공부한 뒤 1998년 영국 10대 디자인 스튜디오 중 하나인 탠저린에 인턴사원으로 입사한 이 대표는 7년 만인 2005년 2인 공동대표 중 1인이 됐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중공업뿐 아니라 애플,히타치,알카텔,닛산,도요타,소니,니콘 등 글로벌 기업들이 탠저린의 고객이다.

이 대표는 제품 디자인만 해주지는 않는다. 디자인 비전 · 전략 등을 세우는 '디자인 매니지먼트'라는 확장된 개념의 디자인이 주요 사업이다. 그는 "좋은 산업디자인은 기업 브랜드 전략과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1등 기업은 물과 공기 같은 환경에 최적화된 디자인이 적합하지만 2등 기업은 튀는 디자인이 필요하고 3등은 틈새시장을 노린 디자인이나 디자인의 패러다임 변화를 시도하는 게 옳다는 얘기다.

한국의 산업디자인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 대표는 "대기업은 세계적 수준이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크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비용을 줄이는 게 디자인"이라며 "아직 디자인 중심의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