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을 둘러싼 최근의 공격들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거대 자본이 골목길까지 들어와 영세상인을 궤멸시킨다거나 대기업이 중소상공인의 영역까지 들어와 생존기반을 침식시킨다는 생각들이 모두 그렇다. 지역경제,영세상인,거대자본 등의 단어만 적당히 연결하면 시장을 공격하는 논리를 구성하는 데 그다지 불편이 없다. 여기에 지역문화 전통가치 민주주의 주권 등의 단어를 덧붙이면 영락없는 반세계화 논변으로 재구성된다. 이미 판에 박은 논리여서 더 이상 길게 설명할 이유도 없다. 이와 관련된 오래된 논변을 하나 읽어 보자.

"도시 자본가들의 하수인인 소매상들은 지역의 영세 수공업자와 농부들 그리고 지역문화를 파괴한다. 지역의 중소업자들은 우리 사회의 시민이며 뿌리다. 이들의 지위가 도시 상업 자본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이들이 파는 물건들은 런던 파리 독일의 대도시에서 흘러들어온다. 분업화를 통해 생산된 이들 상품의 질이 좋고 값이 싼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결국 우리 지역의 경제를 파괴한다. "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2세기도 더 전인 18세기 중반 서부 독일 오스나브뤼크에 살았던 한 시골 향사(鄕士)가 쓴 글이다. 그의 이름은 유스투스 뫼저다. 오늘날 반세계화 논변의 원조라고도 할 만한 이 글에 대해 동시대인이었던 애덤 스미스가 반론을 폈다. 스미스는 뫼저류의 시장반대론을 소개한 다음 이런 종류의 주장들이 사실은 중세 귀족들의 전통적인 특권 경제를 옹호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소상히 설명했다. 국부론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들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던 것이다. 길드 제도는 스미스의 비판이 아니더라도 뫼저가 우려했던 바로 그런 도시 자본들에 의해 결국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지금 오스나브뤼크에 사는 시민들에게 뫼저의 이 글을 읽어준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서부 독일에서,귀족의 농노요 종복이며 길드 회원이 아니라 자유로운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시민들이 말이다. 이들은 30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직업에서 더 상상하기 힘들 만큼 풍족한 삶을 영위한다.

놀랍게도 올 한 해 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활개쳤던 논리의 하나가 바로 뫼저류의 반시장론들이었다. 국회는 유통산업 규제법을 끝내 개정했고,SSM은 족쇄를 찼으며,정부는 동반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고유업종 등을 다시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 길드 제도를 부활하기 위해 노무현 시대에 끝난 줄 알았던 위원회까지 화려하게 부활시키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허망한 노력들이다. "골목길은 이미 포화상태"라는 절규도 그런 종류에 속한다. 전국적으로 600개면 충분히 포화상태인데 이미 900개가 들어섰다는 SSM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시라.시장은 언제든 포화 아닌 적이 없었고 새로운 진입자에게는 바늘 하나 꽂을 데가 없는 곳이 또한 시장이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유니클로가 탄생하고 월마트가 생겨나고 새로운 상품이 쏟아진다. 시장에서는 언제나 중소상인들이 죽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중소상인이 생겨난다. 이 중 일부는 대기업이 되어 간다.

돌연변이와 혁신이 나타나면서 삶은 풍요로워진다. 거대자본이 중소상인을 다 죽이고 결국에는 시장 자체도 죽고 마는 그런 종말은 결코 오지 않는다. 자본가의 착취가 결국은 자본의 먹잇감인 노동자마저 다 죽일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하나의 상품이 포화에 이르면 필시 새 상품이 나타나고 누군가가 후려쳐 가격이 떨어진 만큼 지출여력이 생긴 소비자들의 추가적인 소비가 또 다른 생산자를 시장으로 불러낸다.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시장이요 진보다. 시골 선비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 점을 잊고 산다.

정규재 논설위원 겸 경제교육硏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