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퓨처매지니먼트그룹 이사이자 미래경영 전문가로 유명한 페로미킥은 미래를 읽는 5개의 안경이 있다고 말했다. 미래의 모습을 가정해 보는 푸른 안경,기회를 읽어내는 초록 안경,비전을 만들어내는 노란 안경,돌발적 상황에 대처하는 붉은 안경,그리고 비전을 실현하는 보라색 안경이다. 지금 이 5개 안경을 통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보이는 흐름이 있다. 융합의 대(大)폭발이다.

미국에서 '기술 융합(Technological Convergence)'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63년이다. 50년 가까이 흐른 지금,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신기술 간,또는 이들과 다른 분야의 상승적 결합을 통한 융합기술이 새로운 기술혁신을 주도할 것이라는 예측은 적중했다. 기술 융합이 산업 융합으로 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마트폰발(發) 폭풍은 그 서곡일 뿐이다.


◆융합은 새로운 산업혁명

다가오는 융합시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게리 샤피로는 이를 '뉴 컨버전스'라고 부르고,다니엘 핑크는 융합과 컨셉트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하지만 이것으로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좀 더 실감있는 표현은 미국의 과학재단(NSF)이 만들어냈다. NSF는 주저없이 산업혁명,IT혁명에 이어 '융합혁명'이 도래했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기술경제학자 리처드 넬슨은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세계 경제의 장기적인 사이클(콘드라티예프)을 이끌어왔던 굵직한 혁명들이 모두 기술적 변화가 사회적,시장적 환경과 맞아떨어졌기에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산업 융합 확산은 기술 융합과 사회적,시장적 변화 사이의 장벽들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강력한 증거일 수 있다. 산업 융합을 '뉴 노멀 시대'의 필연적 파생물로 본다면 이 흐름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게 틀림없다. 바야흐로 기존 산업의 틀을 파괴할 수 있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문이 열렸다. 콘드라티예프의 새로운 '장기 파도(New Long Wave)'로 발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융합혁명의 승자는 누구인가

누가 이 새로운 산업혁명의 승자가 될 것인가. 변화를 일찍 예감한 기업들이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새로운 기회를 말하지만 반대로 이 거대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급류에 휩쓸리듯이 바로 도태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동시에 엄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팟,아이폰,아이패드 등을 앞세운 애플이 선발대적인 혁신을 몰고 왔다. 경쟁 기업들은 이것을 보고 융합이 더 이상 미래가 아닌,시장의 현실이 됐음을 거듭 확인했다.

"여기서 네가 머물기를 원한다면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 " 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 앨리스'에 등장하는 이른바 레드 퀸(Red Queen)이 말하는 경주,'진화의 대(大)경주'가 시작됐다. 융합 경쟁이 본격화했을 때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융합 경쟁을 벌이는 기업들이 많아질수록 더 거대한 변화가 몰아칠 것이라는 점이다.

기존 기술 및 산업분류체계가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융합시대의 산업이 자동차 조선 철강 금융 등 공급자 중심에서 건강 지식 복지 등 소비자 요구를 기준으로 전면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대두되고 있다. 과연 어느 국가가 물리적인 융합기술과 법,제도 등 사회적인 기술 간의 선순환을 빨리 형성하느냐에 따라 국가 경쟁력도,기업 경쟁력도 그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릴 것이다.

안현실 논설 · 전문위원/경영과학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