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후면 설,구정(舊正)이다. 나는 설 즈음이면 정말 소식이 궁금한 사람이 하나 있다. 1968년 베트남전에서 조우한 어떤 월맹군 병사다. 테트라고 불리는 베트남의 구정 연휴 기간인 1968년 1월30일을 전후로 월맹군은 총 공세를 퍼부었다. 이들의 구정 공세 이후 해병대는 어디를 가도 번번이 적과 조우했다.

어느 날 우리는 숲과 숲 사이에 산간지방 농촌 같이 벼를 심지 않은 조그만 논이 서로 붙어 있는 개활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적들이 숲 저쪽에서 우리를 먼저 발견하고 맹렬히 사격을 가해왔다. 적의 위치를 알 수 없었던 우리는 우선 몸을 숨기기 위해 엎드렸다.

가장 낮은 자세로 하늘을 향해 드러누워 있었는데 얼마나 적탄이 낮게 깔려 날아오는지 내 눈 바로 위의 소나무 가지가 적탄을 맞고 얼굴 위로 계속 떨어져 내렸다. 그대로 있을 수만 없어서 몸을 돌려 살며시 고개를 들었더니,건너편 숲속 가장자리에서 적의 사격지점이 여러 군데 보였다. 소대원들에게 3~4시 방향에 있는 적의 위치를 가르쳐주고 사격을 집중하도록 했다.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고만 있으면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심이 더해지기 때문에 어찌해서든 적을 찾아 사격을 시작해야 한다. 적을 향해 사격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격 소음 때문에 적의 사격 소리를 잘 들을 수 없게 되고,이에 따라 두려움과 공포심이 사라지게 된다.

나와 함께 있던 2분대로 하여금 10여m 전방에 있는 논둑까지 먼저 접근토록 하고 1,3분대가 이를 엄호하도록 했다. 2분대가 논둑을 점령하고 엄호사격을 할 때부터 전 소대가 일제 약진으로 사격을 하면서 돌격하도록 했다. 그때부터는 아무 두려움도 없었다. 용감하게 물이 차 있는 여러 개의 논을 철벅거리며 뛰어 건너편 숲에 닿았다.

숲속을 수색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깜짝 놀랐다. AK소총을 든 적군이 내 앞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불과 1m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내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고 정지되는 듯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놈이 적군인데! 죽여야 하는데'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아무 동작도 할 수 없었다. 적도 나도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던 찰나 그가 먼저 뒤로 돌아서더니 숲속으로 달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쏴야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좀처럼 사격자세를 취할 수 없었고,그는 계속 달렸다. 20여m쯤 멀어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방아쇠를 당겼고,계속 당겼다. 사관후보생 시절부터 권총과 M1 소총 둘 다 특등사수였지만 그가 숲속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는 데도 나는 결국 그를 맞추지 못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AK 소총을 들고 나를 쳐다보고 서 있던 그 월맹군을 잊지 못하고 있다. 가끔씩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설 때면 갑자기 나타나 빤히 쳐다보는 환각현상도 많았다. 그 친구 지금도 살아있을까? 뭘 하고 있을까?

전도봉 < 한전KDN 사장 ceo@kd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