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통신에서부터 금융 유통 식품 광산 건설 담배 인쇄까지 200여개 회사를 거느린 기업 총수다. 상장된 회사만도 멕시코 증시 시가총액의 30~40%를 차지한다. 멕시코인들이 쓰는 돈 중 절반 이상이 그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소리를 듣는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올해의 세계 최고 부자로 꼽은 멕시코 카르소그룹의 카를로스 슬림 회장이다.

재산은 740억달러(82조5000억원)로 빌 게이츠(560억달러),워런 버핏(500억달러)보다 많다. 작년 1년 새 205억달러(22조8575억원)나 벌었다. 하루 626억원씩 불어난 셈이다. 여전히 검소한 생활을 한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집은 침실 6개에 작은 풀장이 딸려 있을 뿐이다. 회사에서도 다른 경영진과 비서를 공동으로 쓰고 보좌진도 따로 두지 않는다. 즐겨 타는 차도 쉐보레 서버번이다. 얼마 전까지 싸구려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1970년대다.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번 돈을 기업 인수 · 합병에 적극 투자하면서부터다. 특히 1980년대 멕시코가 경제위기를 겪을 무렵 여러 회사를 헐값에 사들인 후 번듯하게 키워냈다. 1984년 1300만달러에 인수한 보험사의 가치는 15억달러로 높아졌다. 거부로 올라서는 발판이 된 것은 1990년 국영 통신업체 '텔멕스'의 지분 인수다. 텔멕스는 성장을 거듭해 멕시코 유선 전화 시장의 92%를 장악했다.

여기에 텔멕스 무선통신 부문을 분사해 만든 이동통신회사 '아메리카 모바일'이 대박을 쳤다. 멕시코 이동통신시장의 75%를 확보한 건 물론 콜롬비아 브라질 등 해외 17개국에서도 1억명이 넘는 가입자를 끌어들였다. 그의 히트작은 선불 휴대폰이다. 다른 업체들이 상류층에 매달릴 때 그는 중 · 하류층을 공략했다. 결국 판세를 뒤집었다. 슬림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사탕 하나 사먹은 것까지 기록하며 경제감각을 익힌 것이 부의 기반이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식에게 물려줄 가장 귀중한 자산은 돈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라고 늘 강조한다.

정치인과는 절대 사업하지 말라는 소신도 갖고 있다. 정치인이 결정적일 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어디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다른 역대 최고 부자들과 차이점도 있다. 빌 게이츠는 인터넷,록펠러는 석유 등 당시 첨단산업에서 부를 일군 반면 슬림은 주로 기존 산업에서 강자가 되었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