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 철학의 부재는 비참하다. 이명박 정부의 모 핵심인사는 요즘 노무현 정부 시절에 만든 2020인가 뭔가 하는 먼지 쌓인 좌파 로드맵을 찾아 머리를 박고 베끼고 있다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지난주에는 국세청까지 나서 재벌 때려잡기 식의 공정과세 깃발을 들고 나왔다. 초과 이익을 내놓아라는 정운찬 발상이 벽에 막히면서 꺼내든 조자룡의 헌 칼이다. 재벌 후계자의 편법적인 재산 형성과 상속에 과세하겠다는 오래 된 슬로건은 당연히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대기업 후계자들이 원초적 부(富)를 형성하기 위해 계열사를 통해 일감을 몰아간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쟁하는 중소기업들이 밀려나 눈물을 떨구는 것도 이 대목이다. 그러나 일감몰아주기를 어떤 방법으로 과세할지는 정말 궁금하다. 시장가격에 의해 이루어지는 거래를 어디까지 부당하다고 볼 것이며 혹여 기업 가치의 증가분에 포괄주의로 과세하는 방법을 만들어 낸다면 이는 로마 제국 이래의 세정 혁신이며 파치올리가 처음 복식부기를 작성한 1494년 이후의 쾌거다.

상속세는 언제나 정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종종 부정의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더구나 한국의 상속세제는 세계에서 가장 잔혹하고 전근대적이다. 65%의 세율은 세계에서도 가장 높다. 더구나 직계 자녀에 대한 상속세는 프랑스(40%) 독일(30%) 네덜란드(27%)가 모두 한국의 절반 이하다. 대부분 문명국가는,특히 직계 자녀들이 기업을 물려받으면 세금을 깎아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자녀가 기업을 물려받는 것을 더 증오한다. 세계 최고의 기업 상속세를 물리는 배경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자식이 계속 경영하고 있는 동안은 세금을 내지 않도록 자본 이득 과세를 이연해주는 국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자식이 기업을 승계하기 위해서는 더많은 상속세를 내야 한다. 세금을 내기 위해 주식을 팔게 되면 이번에는 기업지배권이 흔들린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홍콩 싱가포르는 아예 상속세가 없고 스웨덴조차 2005년 상속세를 완전히 폐지했다. 이들 국가는 바보이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말인지.

지난주 정규재 칼럼(3월28일자)에서 설명하였지만 워런 버핏은 상속세를 한푼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아들에게 벅셔해서웨이 지배권을 상속한다. 한국은 자선재단을 이용한 상속세 회피까지 미리부터 차단하고 있다. 자선재단 주식에는 아예 의결권이 없다. 한국 관료들의 두뇌는 이 대목에서 정말 번쩍인다. 상속세제는 사실 원초적 국가 폭력에 가깝다. 상속세 회피나 일감 몰아주기는 그런 상황에서 기업지배권을 지키고 기업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눈물겨운 고육책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정당한 과세를 회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오로지 한국에서는,상속세를 제대로 내게 되면 기업의 동일성이 무너진다.

청와대가 좋아하는 철학자 존 롤스가 '우연적 여건에 의한 부당한 불평등'의 대표적인 항목으로 지목하였던 것이 바로 상속이다. 소위 정의로운 상속세는 그러나 평생에 걸친 근검절약의 성취물을 박탈하는 실제는 부도덕한 세금이다. 가족에 속한 것을 사회가 강탈해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소비를 장려하고 성공을 처벌한다는 면에서는 반문명적이다. 낭비하거나 저축해온 각기 다른 두 사람에게 매겨지는 상속세를 생각해보라.결국 우리는 다 써버리고 죽는 것을 칭송하며 덕성을 처벌하게 된다.

세금을 정상적으로 낼 의향이 있는 그 누구도 한국의 상속세제 하에서는 자신의 기업을 대기업으로 키워서는 안된다. 대기업이 되는 순간 세율은 50%에서 65%로 껑충 뛰고 창업자의 죽음과 함께 피눈물 같은 기업도 사회에 빼앗긴다. 바보 아닌 그 누가 기업을 키우겠는가. 이명박 정부는 시대착오를 바로잡기는커녕 그것에 편승하고 있다.

정규재 논설실장